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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마침내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함께 상영된 <암살>과 더불어 쌍끌이 쌍천만이란 신화를 쌓은 것이다. 류승완 감독이 그동안 좋은 흥행성적을 보여왔으나 천만에 육박하는 대형 오락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어서, <베테랑>이 <암살> 천만에 페이스 메이커 역할 정도 하지 않겠느냐는 초기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의 힘은 강했다.
그동안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액션에 치중한 측면이 있었고, 사회적 내용을 다룰 때는 영화 분위기가 어두웠었다. 희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부당거래>가 그렇게 어두운 경우였다. 반면에 이번 <베테랑>은 유쾌통쾌했다. 이것이 폭발적인 대중성을 낳았다.
먼저 유쾌한 부분. 형사들이 범인을 잡을 때 그냥 잡지 않았다. 꼭 한번씩 헛발질을 한다든지, 허공에 떨어진다든지 하는 슬랩스틱 개그를 했는데 그게 웃기는 타이밍에 착착 정확히 꽂혔다. 류승완 감독의 오랜 내공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통쾌한 부분은 형사가 재벌을 잡는다는 판타지 설정에서 나왔다. <베테랑>이 형사물로서는 이례적으로 폭발적인 흥행을 했다는데, 그건 일반적인 형사물들이 때려잡는 범인 수준이 아닌 ‘초대형 범털’을 때려잡았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재벌을 수사하는 주체는 검사다. 이때 경찰은 검사의 지시를 받거나, 혹은 재벌의 회유를 받는 존재 정도로 그려진다. 경찰이 일반 잡범 앞에서야 하늘 같은 존재이지만, 재벌에 비하면 감히 맞상대도 할 수 없는 을 중의 을인 것이다.
<베테랑>은 그런 경찰이 재벌을 잡는다는 서민영웅 판타지를 선보였다. 일반 관객에겐 엘리트 검사보다,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몸으로 뛰는 3D 직종 형사가 사회 꼭대기를 때려잡는다는 이야기가 더 통쾌했다.
가장 통쾌한 장면은 형사 황정민이 재벌 유아인에게 ‘븅신아’라고 욕하는 장면이었다. 유아인은 극중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처럼 그려졌다. 재벌 아버지를 제외한 그 누구도 유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유아인은 자신이 마치 고귀한 존재라도 되는 양 허세를 떨었다.
그 유아인이 외국인들과 품위 있게 앉아 비즈니스를 논하는 자리에 ‘육두문자를 내뱉으며 몸으로 뛰는 3D 직종 형사’ 따위가 나타나 말을 섞자, ‘우리나라 경찰이 이러는 걸 알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어떻겠냐’며 경찰에게 우아하고 점잖게 한 마디했다. 바로 그때 시정잡배 같은 을 중의 을 황정민의 입에서 나온 말 ‘ㅈㄴ 더럽겠지 븅신아’, 바로 여기에 천만 관객의 가슴이 뻥 뚫렸다.
아버지를 잘 만나 태어난 것뿐인데, 사람들이 굽실굽실해주니까 자신이 별세계 존재라도 되는 양 돈으로 산 교양으로 몸을 휘감고 남들을 아래로 굽어보는 재벌 2, 3세에게 떨어진 형사 ‘나부랭이’의 한 마디, ‘븅신아, 주제파악 좀 해’. 툭하면 터져나오는 재벌 2, 3세 갑질 보도로 답답해진 국민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한 마디였다.
이러한 유쾌통쾌와 함께 류승완 감독의 장기인 액션도 유감없이 표현됐다. 심지어 무협을 내세운 <협녀, 칼의 기억>보다 <베테랑>의 액션이 더 시각적 쾌감이 컸을 정도다. 재벌을 들이받는 ‘똘끼’에 제이슨 본을 방불케 하는 액션까지, 류승완과 황정민이 구현해준 형사는 그야말로 국민판타지의 이상형이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국민이 경찰에게 바라는 모습이다. 서민 앞에서만 강하고 재벌 앞에선 약한 경찰이 아닌, 재벌도 들이받을 수 있는 의협심과 그들의 물리력을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경찰 말이다. 결국 협객으로서의 경찰인 셈인데, <협녀, 칼의 기억>은 협녀를 제대로 그리지 못했지만 <베테랑>은 협객 황정민을 시원시원하게 그렸다.
류승완은 <베테랑>의 분위기가 이전 영화보다 밝아진 것에 대해,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소통하고 싶다고 생각한, 나의 첫 번째 영화가 ‘베테랑’이다. 후배들에게까지 패배감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저항해 보자는 것이다.”라고 했다. 현실은 우울하고 답답하지만, 영화 속에서만이라도 이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현실에서 지기만 하던 서민 관객들이 이기는 영화에 환호했다.
한국 재벌은 국가경제성장을 위한 일종의 돌격대 역할로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컸다. 그렇게 큰 재벌이 이제와서 자기 혼자의 힘으로만 컸다고 생각하면서 국민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 하고, 신귀족 행세를 하면 이를 보는 시각이 고울 리 없다. 이렇게 형성된 반재벌정서가 반기업정서로 발전한다면 우리 경제의 불행이다.
그런 파국을 막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베테랑> 같은 영화가 흥행할 수 없는, 국민들이 재벌 때리는 영화를 보며 통쾌함을 느끼지 않는, 그런 나라가 돼야 한다. 재벌이 좀 더 우리 국민경제에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재벌 2, 3세들이 좀 더 겸허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야 <베테랑> 같은 영화에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정상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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