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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사도, 영조는 정말 아들을 죽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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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500만 관객을 넘어섰다. 이준익 감독이 목표로 했던 수치를 벌써 달성한 것이다. 이 영화는 오락적인 요소도 적고, 특별한 시각적 쾌감을 주지도 않으며, 기분 좋은 감동도 없다는 점에서 천만 영화 <광해>와 대비된다. 매체들이 <사도>가 개봉하자마자 천만 초시계를 쟀으나 정작 이준익 감독은 500만 정도를 목표라고 한 것은, <사도>의 오락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감독 자신이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개봉 후 쾌속질주를 거듭해 500만을 조기에 넘겨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하는 비극적인 스토리를 욕심 내지 않고 찬찬히 전개한 것이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사도세자의 의대증(옷을 입지 못하는 병)이나 광증 등이 어떤 맥락에서 발현된 것인지를 디테일하게 표현한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듯한 느낌을 준 것도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

 

비교적 역사 기록에 충실했다는 <명량>마저도, 있지도 않은 배설의 이순신 암살 시도를 그리는가 하면 이순신이 직접 백병전에 나섰다는 황당한 설정까지 선보였다. 이럴 정도로 요즘엔 사극이 역사기록을 무시하는 것이 유행인데, <사도>는 모처럼 기록에 근거한 건실한 사극의 모습을 보여줬다. 정통적 스타일이지만 요즘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 작품은 영화스타일뿐만 아니라 사도세자를 보는 시각도 정통적이다. 사도세자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미치광이 관점이고 또 하나는 개혁군주 관점이다. 미치광이 관점은 아들이 미쳐서 아버지가 죽였다는 이야기이고, 개혁군주 관점은 소론과 친한 개혁 정치가 사도세자를 노론이 제거했다는 이야기다. 미치광이 관점이 과거 사극에 일반적으로 등장했던 정통적 관점인 반면, 개혁군주 관점은 최근 사극에서 부각됐다.

 

개혁군주 관점은 조선 후기를 노론에 대한 투쟁사로 보는 입장에서 비롯한다. 서인-노론으로 이어지는 기득권 세력이 광해군, 소현세자, 경종, 사도세자, 정조 등을 죽이거나 밀어내고 마침내 조선을 패망으로 이끌었다는 시각이다. 노론에게 밀려난 인물들이 사극에서 반노론 영웅으로 조명 받는다. <비밀의 문>이 그런 관점에서 사도세자를 그렸고, <무사 백동수>에서도 그런 관점의 사도세자가 암시됐다.

 

<사도>는 그런 관점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큰 틀에선 전통적인 미치광이 관점으로 회귀했기 때문에 요즘 사극 트렌드에서 상당히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조선 후기 사극을 통해 기득권 체제를 통타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관객들의 기대에서 어긋났다. 그래서 일각의 악평도 나타난다.

 

 

그런 문제와 별개로, <사도>는 어떻게 아버지가 자식을 미치게 만들고 죽이기까지 했는지 그 가족사를 찬찬히 묘사해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영조에겐 천한 출신이 왕좌를 훔쳤다는 시각에 의한 콤플렉스가 있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학문적으로나 덕성으로나 뛰어난 왕재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다. 비극은 그것이 아들에게 투영된 것에서 탄생했다.

 

아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학문과 몸가짐 모든 면에서 제왕의 모습을 보일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세자와 전쟁놀이를 한 상궁들을 처형할 만큼 공포분위기도 조성했다. 차라리 세자가 둔재였다면 아버지가 가라는 방향으로 가는 시늉이라도 하며 적당히 살았겠지만, 사도세자는 영재였다. 자신만의 주견과 개성이 뚜렷했고 아버지와는 기질적으로 달랐다. 영조는 그런 아들이 마땅치 않았고, 학문과 몸가짐에 대해 끝없이 억압하여 결국 사도세자에게 광증이 발현되고 말았다.

 

 

영화는 이런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현되는 과정을 자세히 표현해 관객을 몰입시킨다. 마침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정조가 통곡하는 장면에 이르러선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도 나타난다. <사도>가 이렇게 가정사에 집중하면서 이 작품은 결국 교육잔혹극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우등생으로 만들려는 아버지의 강압적 교육에 엇나가는 아들, 파괴되는 가족의 이야기다.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이 시대에 수많은 가정에서 반복되는 교육잔혹사다. <사도>는 지극히 현대적인 자식교육 우화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수많은 이 시대의 영조들에게 보내는 경고메시지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사도>는 현재성을 획득했다.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며 부모자식간의 관계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는 질문. 도대체 아버지는 왜 아들을 죽였을까? 여기에 대해선 이론이 분분한데 이런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영조는 아들을 죽인 게 아니라 다음 왕을 선택한 것이다. 사도세자와 정조라는 두 후보 중에 정조를 선택했다. 그런데 정조를 다음 왕으로 온전히 만들기 위해선 사도세자를 제거해야 한다. 사도세자가 정조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정조의 형 정도만 됐어도 죽이진 않았을지 모른다.

 

다음 왕의 후보가 아니라 순수한 아들과 손자라면 당연히 안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영조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부적격 후보를 제거했을 뿐이다. 이것은 왕가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사도>는 바로 그런 왕가의 가정사라는 특수한 이야기를 촘촘히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