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의 열기로 들뜬 사이에 자그마한 이변이 일어났다. 무슨 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더니 SBS예능에 햇볕이 든 사건이다. 이번 주 ‘패밀리가 떴다’가 포함된 <일요일이 좋다>가 일요일 예능 시청률 1위에 올랐다. ‘1박2일’이 포함된 <해피선데이>를 제친 것이다.
‘기적의 승부사’, ‘옛날TV' 등의 조기 종영으로 SBS예능은 적막강산이었다. <라인업>까지 몰락해 최악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패밀리가 떴다’가 당대 최고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과 맞붙어 건실한 2위만 해도 SBS입장에선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런데 ‘1박2일’을 제친 것이다.
아무 색깔이나 메달만 땄으면 좋겠다 하고 출사표를 던졌는데 덜컥 금메달을 딴 셈이다. 역시 흥행의 세계는 냉정하다. 나는 이번 주 ‘패밀리가 떴다’를 보면서 정신없이 웃었는데 다른 시청자들도 같은 재미를 느꼈나보다. 재미를 주는 곳으로 가차 없이 돌아가는 채널. 시청률 경쟁이 전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이유를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다.
이번 주 ‘패밀리가 떴다’에선 전통적인 게임쇼의 재미에 지금까지 쌓아온 설정의 묘미가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계곡에서 벌어진 인간 장애물 넘기 게임의 대난장판에서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았다. 멤버들끼리 엎치락뒷치락하다가 급기야는 서로 머리를 부여쥐고 난투극에 돌입하는 경과였는데, 사실 이런 게임쇼야 옛날부터 질리도록 봐왔던 것이다. ‘패밀리가 떴다’의 전 프로그램인 ‘기적의 승부사’는 게임으로 도배를 했지만 이만큼 재밌지 않았었다.
같은 게임인데도 유독 재미를 느낀다는 것은, ‘패밀리가 떴다’가 그동안 지속적으로 구축한 멤버들 사이의 관계와 캐릭터가 드디어 사람들의 몰입을 이끌어내기 시작했다는 징후다.
맥없이 쓰러지는 이천희를 보고 웃음이 나는 것은, 이천희라는 캐릭터가 이미 머릿속에 저장돼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 저 사람 또 쓰러지네. 어, 저 사람 또 당하네.’라는 느낌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즉 ‘패밀리가 떴다’가 첫 회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설정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다.
단순히 유재석이 물고기를 잡아 손질한다는 별것도 아닌 사건 하나가 흥미를 대폭 유발하는 것도 그렇다. 박예진에게만 기대왔던 칼질을 유재석이 직접 한다는 의외성이 흥미의 원인인데, ‘패밀리가 떴다’의 전사가 그런 의외성의 폭발력을 축적했다.
김수로와 유재석이 야채를 따러 가는 에피소드도 의외성으로 흥미를 유발했다. 지금까지 유재석은 대성과만 짝꿍을 이뤘었기 때문이다. 김수로는 이천희를 구박하던 그 캐릭터 그대로 유재석에게 계모노릇을 했다. 대성과 유재석이 김수로에게 가로막혀 서로 그리워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던지.
그동안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김수로도 이소룡 흉내를 내며 옥수수를 따는 장면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옆에서 같이 장단 맞추는 유재석의 표정도 압권이었다. 캐릭터 설정의 힘은 그 다음에 나왔다. 언제나 이천희에게 궂은 일을 떠맡기며 왕고참 노릇을 하던 김수로가 유재석에게 져서 야채짐을 직접 든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체면을 위해 남들 앞에서는 짐을 들지 않으려고 유재석에게 간청하는 비굴한 모습으로 웃음을 유발했다.
그동안 윤종신은 밥을 할 때 라면스프를 구해와 몰래 살포하는 일을 했었다. 이번엔 통조림을 구해왔다. 정말 별것도 아닌 사건인데, 폭발적으로 웃겼다. 맛있는 반찬을 위한 장년층의 혈투였다. 캐릭터들의 설정에 감정이입이 되지 않고서는 이런 소소한 사건들이 재밌을 수가 없다.
재미를 주기 위해서 수많은 연예인들이 몸을 던지고, 엄청난 쇼를 하고, 제작비를 퍼붓는다. 그래도 대부분은 외면당한다. 하지만 일단 설정이 힘을 발휘해 시청자가 캐릭터들에게 감정이입을 시작하면 정말 별것도 아닌 사건들이 초미의 관심사가 된다. 지금까지의 캐릭터 설정을 재생산하면서 물고 물리는 것도 재밌고, 순간적으로 설정을 뒤집는 것도 전복적인 쾌감을 준다.
<무한도전>에서 유재석이 박명수 캐릭터를 흉내 내면서 엄청난 재미를 줬다. 선인과 악인의 전복, 당하는 자와 폭력자의 관계전복이었다. 아무 배경 없이, 어느 날 문득, 어느 쇼프로그램에서 유재석이 박명수 흉내를 아무리 잘 낸들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을 것이다. <무한도전>의 설정에 감정이입이 된 상태에서 캐릭터 전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웃겼다.
‘패밀리가 떴다’에서 소소한 사건들이 이렇게 ‘빅 재미’를 준다는 것은, ‘패밀리가 떴다’에 대한 감정이입의 수위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정이 이입됐으므로 엎어져도 재밌고, 아옹다옹 밥 해먹는 것도 재밌다.
출연자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장단점 얘기하고, 인기투표하는 것은 익숙한 진행이다. 이번 ‘패밀리가 떴다’에서 그것이 유독 웃겼는데 그것도 이미 각 캐릭터들에게 감정이 이입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패밀리가 떴다’의 시청률이 대폭 상승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캐릭터 설정 자체가 힘을 가지고 스스로 극을 이끌어가는 데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같다. 어떤 프로그램이 여기까지 가면 강력한 흡인력을 발휘하게 된다. <거침없이 하이킥>, <무한도전>, ‘1박2일’ 등이 모두 이런 경과를 거쳤다.
‘패밀리가 떴다’는 초기라서 얼마만큼 강력하게 설정의 힘을 발휘할 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시동이 걸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리얼 3파전이 흥미로워지고 있다. ‘1박2일’은 큰 이야기를 하고, ‘패밀리가 떴다’는 작은 이야기를 하고, <무한도전>은 엉뚱한 이야기를 한다. 덧붙여 ‘우리 결혼했어요’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번 주는 ‘패밀리가 떴다’가 ‘빅 재미’를 주고, <무한도전>이 신선함을 줬다. 다음 주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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