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는 여성그룹 라이벌전으로 끝났다. 쥬얼리 대 브라운 아이드 걸스, 그리고 원더걸스 대 소녀시대. 2008년 상반기 온라인 음원순위 2위는 쥬얼리의 ‘one more time’이고, 1위는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L.O.V.E'였다.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는 거의 신드롬에 가까운 화제를 뿌렸다. 상반기 결산 <뮤직뱅크>도 사실상 이 여성그룹들이 주인공이다시피 했다.
올 여름엔 세 여성의 라이벌전이 화제의 중심이다. 차례차례 컴백한 엄정화, 이효리, 서인영이다. 더 크게 보면 ‘컴백’ 자체가 올 여름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세 여성 가수 이외에 쿨의 컴백이 있었고, 서태지의 어마어마한 컴백이 있었다. 하지만 서태지와 쿨은 각각 별개의 활동영역이라서 화제를 뿌리는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진 않는다.
엄정화, 이효리, 서인영은 모두 다 이른바 ‘섹시’ 컨셉이라는 데서 겹친다. 듣기만 하는 노래가 아닌 보는 무대, 즉 ‘쇼’를 추구한다. 그래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 서태지가 돌아오면 이번엔 어떤 ‘노래’인지가 궁금하다. 그러나 이 세 명이 돌아오면 이번엔 어떤 ‘무대‘, 어떤 ’스타일‘인지가 궁금하다. 역시 세 명 다 공들인 쇼를 가지고 컴백했다. 물론 노래가 아주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가수이니만큼 노래가 중요하다는 건 기본이다.
엄정화, 이효리, 서인영에게 또 겹치는 코드가 있다면 ‘자신감’이다. 이번에도 엄정화는 ‘제 멋대로’ 춤추라고 하고, 이효리는 당당한 ‘유 고 걸’이 되라 하고, 서인영은 ‘내가 대세’라고 한다. 자신감은 솔직함으로 이어진다. 세 명 다 감춤 없이 자기자신을 드러낸다. 이효리는 털털하다는 소리까지 듣는다. 서인영은 ‘신상밝힘증’을 꾸밈없이 드러냄으로서 비호감의 저항을 단박에 돌파했다.
그것은 자신의 육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이어진다. 단순히 옷을 벗는 차원이 아닌, 자신의 몸에 대한 숨김없는 자신감이다. 엄정화의 ‘전신 타이즈’가 그것을 상징한다. 그 자신감은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포함한다. 이효리는 자기의 상반신은 서구적인데 하반신은 동양적이어서 잘 때도 하이힐을 신고 잔다며 신체 콤플렉스까지 유머의 소재로 삼는다. 그런 강력한 자신감은 셋 모두에게 모종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다른 가수들과 차별되는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이다. 그런 것이 이 셋을 비교대상이 되게끔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올 여름 섹시3파전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본 사람은 서인영이다. 엄정화는 71년생, 이효리는 79년생인데 서인영은 84년생이다. 관록의 차이가 현저하다. 그런데도 엄정화, 이효리와 동급에 올라섰다. 대결의 승패가 어떻게 되든 이 셋이 비교된다는 것 자체가 서인영에겐 성공이다.
과거 정치에 도전했던 정주영 전 현대회장의 꿈이 JY로 불리는 것이란 말이 있었다. 당시 이름이 영어약자로 표현되는 인물은 JP, YS, DJ였다. 영어약자로 불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삼김 씨와 같은 반열로 올라선다는 의미가 있었다. 서인영이 엄정화, 이효리와 비교되는 것은 정 회장이 JY로 불리는 것과 같은 사건이다.
이것을 단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의 후광이라고 보기만은 어렵다. 서인영이 당대 최고 인기 프로그램의 하나인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 뛰어오른 것은 아니다. 얄궂게도 <우리 결혼했어요>에 함께 출연중인 황보도 올 여름에 컴백했다. 하지만 서인영만 엄정화, 이효리와 비교되고 있다. 서인영 개인의 매력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프로그램의 후광 효과도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이효리도 서인영과 비슷한 경우다. 유재석과 국민 남매로 자리매김하며 SBS예능의 ‘핫’한 ‘신상’인 <패밀리가 떴다>로 ‘이효리 효과’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만방에 과시했다. 그리고 연이어 음악계에 컴백했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예능의 화제성에 이효리 개인의 힘이 더해져 파괴력이 증폭됐다. (황보는 이 셋과 달리 너무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요즘엔 내가 대세’라는 서인영의 뻔뻔함이 없다. 그러자 존재감도 희박해져간다.)
이에 반해 엄정화는 대중적으로 가장 불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다. 서인영과 이효리가 최고 예능인으로 매주 화제를 뿌릴 때 엄정화는 한국 대중문화계에서 위축됐던 영화활동을 해왔다. 예능천하 시대에 예능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세 사람 중에 가요계 주 소비층인 십대들에게 가장 먼 가수가 됐다.
이효리는 단순한 가수를 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단순히 ‘섹시 코드’로만은 설명할 수 없다. 한 일간지가 2008년에 각계 전문직 여성, 이른바 ‘알파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을 때 이들은 가장 닮고 싶은 스타로 이효리를 지목했다. 이 조사에서 이효리는 ‘알파걸의 선두주자’ 등 9개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감 있는 여성의 역할모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3파전은 대중적으로도 이효리의 압승으로 흘러가고 있다. 컴백 2주 만에 SBS <인기가요>, M.net <엠카운트다운>과 KBS <뮤직뱅크> 1위를 휩쓸었다. 제2의 전성기라고들 한다. 음악활동, 예능활동이 모두 최정점이다.
이효리가 국민 방송인의 길을 가고 있다면 엄정화는 가수의 길을 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부터도 셋 중에 엄정화가 가장 가수 이미지가 강했다. 서인영은 아직까지는 방송연예인 이미지가 강하다. 이효리는 서인영과 엄정화의 중간이다. 셋 중에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인정을 받았던 것도 엄정화다. 엄정화는 일렉트로닉 음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번에 들고 나온 것도 일렉트로닉이다.
반면에 다른 둘은 음악적 자의식보다는 연예활동용 이벤트로서의 음악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이벤트는 나쁘고 음악이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벤트도 완벽한 이벤트는 예술이다. 특정 장르만 고집한다고 음악이 저절로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엄정화에게 음악적 이미지가 원래부터도 가장 강했다는 뜻이다.
이효리는 아주 잘 만들어진 ‘팝음악쇼‘를 가지고 나왔다. 대중적으로는 엄정화가 밀린다. 하지만 엄정화는 음악적 자존심을 지켰다. 음악에 공 들인 티가 난다. 각자 자신들이 추구하는 방향에서 최선을 다했다. 서인영은 음악으로 보나, 쇼로 보나 가장 밀린다. 하지만 가장 젊다. 셋이 같은 반열에 오른 것으로 신분상승과 같은 성과를 얻었다.
셋 모두가 승자인 보기 드문 경합이다. 하지만 난 음악적 자존심으로 ‘영원한 언니‘가 되려 하는 엄정화에게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셋 중에서 다음 음반이 가장 궁금한 가수가 엄정화다. 섹시를 넘어선 카리스마로, 명실상부하게 한국의 마돈나가 되어가는 엄정화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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