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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베이징올림픽 가짜와 팽창주의의 얼룩


 

 2008년 올림픽에 대한 중국인의 기대는 대단했다. 거의 한풀이 씻김굿 같다. 중국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자존심이 큰 나라일 것이다. 자국중심주의로 악명 높은 미국도 중국인의 국가적 자부심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무어니 무어니 해도 중국은 나라 이름 자체가 중국(中國) 아닌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무지막지한 자부심이다. 그런데 근세 들어 그 자부심은 무참히 무너져내렸다. 중국은 저개발 빈곤국의 대명사가 됐다. 천명을 받은 선진 중화제국의 체모가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타국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제국의 상처투성이 자존감은 한이 되었다.


 그 한은 발전과 국위회복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집착으로 발현됐다. 사상 최약체 중화제국으로 수모를 감수하던 현대의 중국은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들을 능멸하던 다른 나라에 대한 응어리진 마음도 함께 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자국을 약소국이라고 생각한다. 외침으로 점철된 역사 운운하는 관행화된 문구가 그것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은 지난 세월 빈곤국이었어도 자존심이 덜 상처받을 수 있었다. 그런 한국조차도 발전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 그것은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의 거국적 열정으로 발현됐다.


 하물며 중국이야. 중국인의 거대한 자부심과 현실의 비루함 사이에 놓인 괴리는 엄청나다. 한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비참함으로부터 탈출하고야 말겠다는 열망이 이번 올림픽에 집약됐다. 단지 탈출하는 수준이 아니라 중화제국의 영광을 회복하겠다는 원대한 야망이다. 전 세계인이 보는 올림픽은 스스로의 위상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함으로서, 중화제국 재건의 첫 걸음을 내딛는 자리가 됐다.


 중국 5,000년 역사의 염원을 담은 영광의 이벤트. 아편전쟁 이후 치욕적인 굴욕의 역사를 마감하는 진정한 광복의 선언. 인류 역사 이래 거의 언제나 세계 최선진지역이었던 동아시아의 헤게모니 회복, 그리고 황하문명의 리더십 회복.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중국. 이것이 이번 올림픽에 담긴 중국인의 염원이다.


 개막식은 그 염원을 형상화한 행사였다. 그러므로 중화제국이 위대한 것만큼 개막식은 위대해야 했다. 개막식의 위대하고 거대한 예술적 이벤트로 중화제국의 거대함과 위대한 문화성을 대내외에 과시해야 했던 것이다. 중국 당국은 세계적 거장인 장예모 감독에게 올림픽 개막식 연출을 맡겨 기대를 고조시켰다.


-가짜 추문을 남긴 올림픽개막식-


 욕심이 너무 과했던 것일까? 성대히 치러진 올림픽개막식은 곧 추문에 휩싸였다. 개막식이 치러지고 며칠 후 TV에서 보여진 개막식 장면 중 일부가 컴퓨터그래픽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베이징 일대에 불꽃놀이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역동적인 장면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베이징 시는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곳이었다고 한다. 공기오염 때문이다.


 오염은 중국의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화제국의 위대함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TV를 통해 세계인에게 보여진 것은 맑고, 청명하고, 역동적인, 그러나 조작된 컴퓨터 그래픽 영상이었다. 이 조작된 위대함을 그리기 위해 이 한 장면을 만드는 데만 1년이 투여됐다고 한다. 결국 세계인은 1년 걸려 만든 그래픽 영상을, 그것이 가상인지도 모른 채 봤다.


 여기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틀 후 또 추문이 터졌다. 이번엔 노래였다. 개막식 때 중국국기가 입장하는 장면에서 '가창조국(歌唱祖國)'이라는 노래를 불러 ‘천상의 목소리’라는 칭호를 받으며 영웅이 된 아이가 사실은 그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 이유가 너무나 황당하다. 진짜 노래의 주인공인 7살 짜리 아이가 올림픽 무대에 서지 못한 이유는 ‘못 생겼기’ 때문이란다. 중화제국의 위대함은 외모가 처지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세계인은 ‘위대한 외모’와 ‘위대한 가창력’이 조합된 립싱크 화면을 본 셈이다.


 여기까지만 했어도 ‘가짜로 점철된 올림픽 개막식’이라는 혹평이 터져 나올 만했다. 완벽한 실황행사가 주는 감동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라는 데에서 나온다. 실수할 수도 있고,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성공적으로 행사가 진행됐을 때 그 긴장이 감동과 놀라움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짜는 그 감동을 배신감으로 추락시킨다.


 며칠 후 가짜 스캔들이 또 터졌다. 중국 내의 각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전통의상을 입고 오성홍기를 든 채 입장해 ‘하나의 중국’, 즉 제국으로서의 중국을 상징하는 이벤트를 펼쳤던 아이들이 사실은 모두 한족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진실이 무어냐는 푸념이 나올 만하다. 한 매체는 개막식 때 이루어진 피아노 연주도 가짜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혼돈스럽기만 하다.


- 중국의 과욕, 위대하지 않았다 -


 완벽하고 위대한 중화제국의 이미지를 과시하겠다는 욕심이 너무 컸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진실을 드러내보이는 것이 진정한 대인의 위대함이다. 모든 것을 다 보기 좋게 꾸며 전시하겠다는 강박증은 소인배의 것이다. 우리나라도 지난 88올림픽 때 서울 영세민들이 도시미관을 해친다며 시외로 내쫓는 소인배의 짓을 저지른 바가 있다. 동방의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미지를 가상으로 만들기 위해 현실을 덮었던 것이다.


 중국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태는 이런 정도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근세에 들어 한국의 꿈이 자주독립이었다면, 중국은 제국의 회복이었다. 스케일이 다르다. 그러므로 열망의 질도 다르다. 우리보다 중국의 위대함에 대한 집착이 더 크고, 공격적이다.


 그것이 개막식에서 가짜 스캔들을 일으키는 무리수로 발전했다. 위대한 북경을 보여주기 위해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하고, 유혈로 번지는 소수민족 독립운동이 펼쳐지는 가운데 하나의 중국을 과시하기 위해 한족에게 소수민족 옷을 입히고, 위대한 중화제국의 이미지를 위해 한 어린이가 장막 뒤에서 노래하게끔 했다.


 이렇게 가짜를 불사하며 만들어진 ‘위대함’은 우악스럽다. 잇따라 터진 스캔들로 개막식의 감동은 반감됐다. 위대함도 실추되고 남은 이미지는 거대한 우악스러움의 공포다. 성화봉송 당시 남의 나라에서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하며 올림픽을 지키려던 그 우악스러움이 개막식 가짜 파문에 겹쳐진다. 양궁에서 보인 우악스러운 응원도 같은 맥락이다.


 원래 중화제국은 문화제국이었다. 힘으로 중화문명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주위 민족들이 스스로 중화문명을 받아 중화제국의 일원이 됐다. 진, 초, 오, 월 등이 모두 그랬고, 만주도 그렇게 복속됐다. 그런 선진성, 개방성과 포용성이 중화제국의 진정한 위대함이다.


 중국이 지금 보이는 것은 단지 ‘거대한 힘‘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압도적으로 강한 중국을 재건해 그 위세를 과시하겠다는 조급증. 그것이 올림픽에 투영됐다. 모든 나라가 올림픽을 자국과시의 장으로 활용하긴 한다. 그러나 제국의 과시는 주변국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베이징올림픽이 보다 진솔하고 포용적이었다면 역설적으로 위대했을 것이다. 위대한 완벽함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위대함을 날려버리고 우악스러운 이미지를 남겼다. 중국을 위해, 또 동아시아를 위해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