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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신의저울 너무 아파서 보기가 괴로웠다

 

 보고 있기가 얼마나 괴로웠던지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SBS의 금요드라마 <신의 저울>을 보면서다. 1회부터 4회까지 비극의 연속이었다. 주인공이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너무나 실감나 고통스러웠다.


 <에덴의 동쪽>에서 이동철(남자 주인공)의 인생도 고난의 연속이다. 아버지 밑에서 잘 크다가 아버지를 잃는다. 그 다음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자들로부터 고난을 당한다. 급기야 방화범으로 몰리고 소년원으로 끌려간다. 거기서도 죽을 고비를 넘긴다. 탈출해서도 그 올가미는 여전히 조여오고, 결국 한국을 뜨고 만다. 이동철은 매회 마다 중대한 추락을 경험한다.


 그것이 서사적이기는 한데, <에덴의 동쪽> 초기 이미숙의 고통의 비해 이동철이 겪는 고통엔 그다지 절절한 느낌은 없다. 아마도 이동철에게서 영웅의 냄새가 나기 때문인 것 같다. 영웅이 미리 겪어야 할 통과의례로서의 고통같은 느낌이랄까? 보고 있자면 아프다기보다는 왠지 멋지다는 느낌이 든다. 헐리우드 영웅물 주인공이 극중에서 아무리 고난을 겪어도 그다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원리와 비슷하다.


 반면에 <에덴의 동쪽> 초기 이미숙의 고통은 아팠다. 이미숙은 영웅으로 탄생하기 위해 수순을 밟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을 잃고, 집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자식을 잃는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처절한 고통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과 유리된 생뚱맞은 고통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초가 당할 법한 아픔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아프다. 마치 어머니가 당하는 것 같다.


- 점철되는 서민의 고통 -


 <신의 저울> 1~4회에서 주인공 중 한 명인 송창의와 그 집안이 당하는 고통도 유사했다. 극중에서 송창의는 사법고시 지망생이다. 또 다른 주인공 집안이 있다. 그 집안은 부장검사(문성근) 집안이다. 그 집 아들도 사법고시 지망생이다. 송창의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하다. 송창의는 여자친구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온 집안의 염원을 담아 검사공부에 매진한다. 문성근의 아들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사법고시 준비를 한다.


 시험에서 문성근의 아들은 붙고 송창의는 떨어졌다. 여기서부터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합격파티날 밤 문성근의 아들은 살인사건에 연루된다. 죽은 사람은 송창의의 여자친구였다. 그런데 송창의가 살인범의 누명을 쓴다. 여기서부터는 그 불행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다. 

 송창의의 집안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다. 송창의의 동생이 형을 공부시키기 위해 거짓 자수한다. 송창의와 어머니는 변호사를 찾아 나선다. 가장 ‘약발’이 잘 먹힌다는 전관 변호사를 찾았다. 그런데 착수금만 3천만 원이고, 성공보수는 1억 원에 달한다. 망설이던 어머니는 자동차에 몸을 던져 숨진다. 이 장면에서는 너무 아파서 화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생명보험금으로 송창의는 변호사를 산다. 그러나 잘 나가는 전관 변호사에게 3천만 원은 돈도 아니었다. 별 성의도 없는 변호 끝에 동생은 중형을 선고 받는다. 아무도 송창의의 처지를 이해해주거나 구명해주는 사람은 없다. 한국 사회는 냉정했다. 결국 송창의는 절치부심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이 사법고시가 한국사회에서 서민에게 허락된 유일한 권력으로의 길이다. <에덴의 동쪽>에서도 이미숙의 소원은 자식이 법관 되는 것이다. 송창의 집안도 법관을 소망했다. 왜 한국의 서민들이 법관에 목을 맬까? 바로 법이, 즉 권력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민에게 냉정하기 때문에 서민들은 스스로 법관이 되길 소망한다. 이것은 ‘한’이 되었다.


 판사를 향해 석궁이 발사된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법원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일반 국민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네티즌들의 반응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시원하다’에 가까웠다. 법관들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국민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법이 그동안 ‘있는 자’의 편을 들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상징하는 표현이 ‘유전무죄 무전유죄’다. 이 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국민은 법에 냉소하며, 또 한편으론 스스로 법관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 앞으로 기대된다 -


 <신의 저울> 1~4회에선 없는 사람이 ‘법’에게 얼마나 냉대를 당하는 지 절절히 그려졌다. 신파조의 전통적인 비극으로 그려진 것도 아니었다. 빠른 템포의 깔끔한 표현으로 주중 미니시리즈처럼 ‘웰메이드’ 드라마의 재미를 함께 줬다. 그 속에 비극이 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신의 저울>은 4회 만에 시청률 12.6%를 기록했다. 이른바 금요일밤의 절대강자라는 <부부클리닉 - 사랑과 전쟁>을 제쳤다. 금요드라마가 <부부클리닉>을 누른 것은 약 8개월 만의 사건(?)이라고 한다. 물론 주중 히트 미니시리즈처럼 화제를 모으거나, 주말 드라마처럼 엄청난 시청률을 올리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시청률로 열성적인 팬층이 형성되는 조짐이 느껴진다. 5~6회에는 사법고시에 붙은 송창의가 진범을 찾기 전에 새로운 갈등이 준비 됐는데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요 인물들의 연기도 탄탄하다. 꽃미남 꽃미녀 스타 중심의 주중 드라마와는 다른 중후한 존재감이 있다. 그 한 복판에 있는 것이 문성근이다. 문성근의 등장이 <신의 저울>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극 중에서 문성근은 법의 정의를 믿는 보기 드문 검사다. 그는 재벌 회장을 소환해 수사하고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한다. 그러나 같은 기간에 그의 아들은 살인사건에 연루되고 송창의가 뒤집어썼다. 송창의가 절규할 때 문성근이 무심히 뒤돌아보다가 멀어져가는 장면이 있었다. 제작진이 그렇게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나에겐 이것이 한국 민주화의 은유처럼 느껴졌다.


 법시스템, 즉 제도적 민주화를 신봉하고 재벌집중을 싫어하는 것이 우리 민주화의 특징이다. 건국 이래 가장 민주화 정권에 가까웠다는 노무현 대통령은 그 자신이 법조인이었다. 그는 시스템의 정치를 신봉했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변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들겠다고 했었다.


 문성근도 법이라는 시스템을 신봉한다. 그리고 재벌을 불편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한다. 우리 민주화도 기득권 세력을 불편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고, 실질적으로는 엄청난 이익을 안겨줬다. 같은 기간 없는 서민이 겪은 건 민생의 고통뿐이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양극화’다.


 문성근이 재벌과 싸운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 송창의가 상징하는 서민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돈이 없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서민의 절규는 재벌에게는 물론 문성근에게도 닿지 않았다. 기득권세력과 민주화세력이 10여 년간 대립하는 동안, 부자들의 재산은 폭증하고 서민은 절규했다.


 그래서 나에겐 ‘재벌 대 곧은 검사 대 처절한 서민‘이라는 삼각 대립구도가 한국 민주화 시대의 은유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좋은 작품‘은 이렇게 강렬한 감정이입을 이끌어내면서 동시에 다층적으로 읽어낼 여지를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저울> 초반부는 좋은 작품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