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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천추태후의 통쾌한 일갈

상식적인 한국인으로 태어나 조선시대 사극을 보아온 어른들은 천추태후의 설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천추태후는 이 땅의 사람들이 아직 성리학에 세뇌되기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선조 성리학 파쇼는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쳤다. 천추태후가 만약 조선중반에 태어났다면 허난설헌처럼 시집에 매여 살다가 요절했을 것이다.


14일에 천추태후에선 채시라와 채시라의 오빠인 왕이 강력하게 대립하는 장면이 방영됐다. 유학을 숭상하며 신라계 유학자들의 추대를 받은 왕은 전통적인 북방인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자기 동생 채시라를 증오한다. 채시라는 그런 오빠에게 한 치도 지지 않고 맞선다.


채시라와 채시라의 동생 설이는 선왕의 비였다. 선왕이 죽은 후 설이는 왕실 사람인 경주원군과 사랑에 빠져 자기들끼리 혼례를 치른다. 유학을 숭상하는 왕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패륜이었다. 그는 경주원군을 귀양 보내고 설이를 단속하지 않은 채시라에게 분노한다.


무엇 때문에 설이와 경주원군의 사이를 막지 않았느냐!


그게 무에 그리 잘못된 것이었습니까?


몰라서 묻느냐? 선왕의 비가 다른 남자와 사통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냐?


과부가 된 이 나라 여인네가 재혼하지 말란 법이 어딨습니까! 혼자된 설희가 평생 혼자 살았어야 속이 시원하십니까?


채시라는 오히려 왕에게 따져 묻는다. 재혼이 왜 나쁜 것이냐고. 그러자 왕은 수절할 것을 주장한다.


수절하는 것이 옳은 길이었다. 그것이 난잡한 백성을 교화하는 길이었다!


하면 왜 전하는 과부를 왕후로 맞았습니까? 뿐만 아니지요. 후궁, 후비도 들였습니다. 이 나라 사내들은 둘셋의 여인을 맞이하면서 왜 여인은 아니 된다는 것입니까? 왜 여인은 남편이 죽으면 수절을 해야 한다 하십니까?


채시라가 따져 묻자 왕은 채시라의 무지를 조롱하며 유학을 내세운다. 그러나 채시라는 유학에 주눅들기는커녕 통쾌하게 일갈한다.


네가 어찌 유학의 가르침을 알겠느냐.


유학이요? 네 모릅니다. 그런 것이 유학이라면 개에게나 던져주겠습니다!


그러자 논리가 궁해진 왕은 패도를 동원한다. 채시라와 그 아들을 죽이는 수가 있다며 입 닥치라고 하는 것이다. 유학이 내세우는 명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통렬히 야유하는 장면이었다.




- 여자는 스캔들도 못 내는 나라 -


최근 경쟁적으로 터지는 연예인 스캔들 기사가 우려되는 것은 스캔들 기사로 인해 피해 받을 여성의 입장이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조 이래 한국에서 여성의 ‘난잡한 남성편력’은 극악무도한 중죄다. 채시라를 협박하는 저 위의 왕이 바로 한국 대중의 모습인 것이다.


‘저들’이 수백여 년에 걸쳐 조선백성을 교화한 결과 한국인은 여성에게 정절을 강요하는 괴물로 조련됐다.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이 한글을 이용해 한 일이 바로 고려조의 습속을 없애고 백성들을 유학 윤리로 세뇌하는 것이었다. 그런 경로를 거쳐 조선 중기 이후 한국인은 새롭게 태어났다.


그 조선인들이 아직도 죽지 않고 여성 연예인의 남성 편력을 단죄하려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닌다. 언론의 스캔들 폭로는 여성 연예인을 그런 대중에게 먹이감으로 던져주는 짓이다. 그래서 우려스럽다.


천추태후는 여자가 왜 수절해야 하냐며, 남자들은 이 여자 저 여자 잘도 갈아대면서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되느냐고 일갈한다. 왕이 여자가 남자를 갈아 치운다고 ‘찌질하게’ 단 악플에 ‘FuckYou'로 대응한 것이다. 이것이 단지 상상이 아니라, 고려 때엔 정말 나올 법한 이야기이므로 더욱 통쾌하다. 지금과 같은 한국인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한국인’이 가능하다는 지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거 대조영에서 초린 역의 박예진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북방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으나, 곧 남성들에게 종속적인 캐릭터로 전락해 실망스러웠었다. 천추태후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유학에 세뇌되기 전 한국 여인의 기상을 표현하려고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중반에 채시라의 캐릭터가 뒤집힐 일은 없을 듯하다.


유학적 세계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신물 나도록 봐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도 그것은 이어진다. 전혀 다른 세상, 전혀 다른 사고방식이 보고 싶다. 훨씬 당당했던 우리의 전통적 여성상. 천추태후의 더욱 통쾌한 도발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