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중사회문화 칼럼

찬란한유산, 애타는 직원들의 한 표

 

요즘 기업을 소재로 한 드라마엔 주식 지분 가지고 경영권 다툼하는 이야기가 수시로 등장한다. 과거에 한국은 누가 지분을 매입해 경영권을 탈취한다든지, 혹은 주식을 샀다고 해서 경영자를 압박하는 것이 불가능한 나라였다. 이것은 미국식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미국에서도 1980년대 이후에야 이런 경향이 심화됐다.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됐고 그 결과가 지금 우리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총장에서의 지분 힘겨루기 모습이다.


주주가 회사의 소유권을 완전히, 배타적으로 갖는다는 생각은 다른 관계자들의 기여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상이다. 하나의 기업이 성장하는 데는 노동자와 국가공동체와 지역사회와 협력업체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주식을 산 사람이 회사의 소유권자가 돼 회사를 자기 마음대로 구조조정하거나 분할매각하는 것은 그들을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요즘 한국인은 이런 주주의 권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원리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주주제일주의는 미국식 원리일 뿐이다. 유럽식 자본주의에서도, 일본식 자본주의에서도 주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미국에서도 1960년대를 전후한 자본주의 황금기 당시엔 기업을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 이후 기업이 단지 주주의 사유물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변했고, 그런 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 최고의 스타 CEO인 잭 웰치 GE회장이었다.


그런 잭 웰치가 주주들을 위해 한 것이 노동자를 대량으로 자르고, 기업을 분할매각해 현금흐름을 개선한 것이었다. 2000년대 한국사회를 배회하는 유령인 ‘구조조정’인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실업자가 생기고, 민생파탄이 축적돼 오늘날 미국 경제위기의 씨앗을 남겼다. 최근 잭 웰치는 경제위기를 당하고 나서 주주제일주의는 가장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반성의 발언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주주의 권리를 신봉하며, 기업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경제학 교과서의 주장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내가 수차례 주주제일주의를 공격하는 글을 썼었는데 그때마다 네티즌 대중은 나의 주장에 분노하거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일축했다. 한국인이 미국인보다도 더 미국인처럼 변해가는 것이다.


<찬란한 유산>의 기업관은 잭 웰치와 정 반대다. 이 드라마에서 기업은 주주의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닌, 기업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사회에 공적인 책임을 다하는 사회적 주체이기도 하다.


장숙자 회장은 자기 손자가 기업을 팔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며, 노동자를 자신과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월급이나 받는 하인처럼 여기자 그에게 유산을 주길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젊은이를 찾아 회사를 맡기려 한다.


주주들과 주주를 대표하는 이사들은 당연히 장숙자 회장의 방침에 불만이 많다. 장숙자 회장이 노동자를 가족처럼 대하고 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하느라 기업의 이익극대화에 비협조적이기 때문이다. 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배임이다. 주주는 무조건 이익극대화를 통한 주가상승, 배당증액만을 바랄 뿐이다.


<찬란한 유산>에서 이사에게 선동당한 주주들은 결국 장숙자 회장의 경영권을 몰수하려 한다. 이것은 결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미국식 경제체제에서 수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런 식으로 주주들의 압력이 강해졌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일 년에 무려 4조 원 가량이나 배당하는 황당한 사태가 터졌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주식 부자들의 부는 점점 늘어가는 대신에 노동자와 일반 서민, 협력 중소업체들의 처지는 날로 열악해진다. 미국이 세계 최대의 부자나라이며 동시에 경악할 수준의 양극화 사회인 것은 이런 구조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양극화가 초래하는 것은 내수파탄과 민생파탄, 그리고 노동자서민의 피눈물이다. <찬란한 유산>은 거기에 맞서 공동체적 경영을 주장한다. 하지만 주주들의 반란에 회장은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거기에 노동자들이 힘을 보탠다. <찬란한 유산>에서 진성 설렁탕의 직원들은 스스로 임금삭감에 동의하며 의결권을 사주 가족에게 몰아준다. 드라마판 사회대타협이다. 스웨덴에선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런 일이 시행됐었다.


이것은 장숙자 회장과 그 손자가 직원들에게 절대적인 믿음을 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숙자 회장이 주주들에게 밀려나면 그다음 닥칠 것은 복지삭감과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노동자들은 애타는 마음으로 회장 일가에게 한 표씩 힘을 모아준 것이다.


여기까지가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 벌어진 ‘찬란한 상황‘이다. 드라마가 찬란할수록 현실은 더 어두워보인다. 우리 현실에선 노동자가 믿고 힘을 몰아줄 사주도, 혹은 스웨덴처럼 전 국민적으로 힘을 몰아줄 중앙권력주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을 알아서 극대화할 뿐이다. 파업과 스펙쌓기와 재테크로.


재테크 시장으로 몰려간 사람들은 주주가 되어 이익극대화를 탐해, 노동자서민을 압박한다. 결국 집단적 자살이다.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한국도 그렇게 돼가고 있다. <찬란한 유산>은 다른 꿈을 펼쳐보인다. 하지만 우리 현실과 너무 다르니 그저 찬란해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