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나오는 시대다. 과거 연말 시상식 시즌에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은 연기대상과 가요대상이었다. 한국인은 가요대상을 보며 한 해를 마무리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국민예능의 시대답게 예능분야를 다루는 연예대상이 상중의 상으로 등극했다. 연말만 되면 유재석, 강호동, 이경규 등의 연예대상 후보자들 이름이 매체를 장식하고, 네티즌은 각자 응원하는 예능인별로 헤쳐모여 게시판 격투를 벌인다. 그들은 ‘무도빠’ ,‘1박빠’ ,‘유빠’ ,‘강빠’ 등 예능 프로그램과 예능인을 기준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도 한다.
연예대상과 예능이 이렇게 부상하는 사이 가요대상은 아예 사라졌고 가요시장은 붕괴해버렸다. 기존 가수들의 심층 인터뷰 때 마다 꼭 나오는 이야기는 ‘노래만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들다’이다.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노래를 안 하는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다. 바로 아이돌이다. 아이돌은 노래가 아닌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나 신체적 매력, 개인기 등을 주로 내세운다. 그런 아이돌들은 기획사의 철저한 조련과 관리에 의해 탄생되고, 음반 팔리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무대를 발로 뛰어 수익을 창출한다. 그래서 이제 가수들 심층 인터뷰 때 ‘노래만 해가지고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얘기가 안 나오는 대신에, (기획사의 엄격한 몸매 관리에 의해) ‘배가 고프다. 밥을 먹고 싶다.’, (지나친 스케줄 소화 때문에) ‘졸립다. 피곤하다’는 호소가 연이어 터져 나오는 시대가 됐다.
노래만으로 먹고 살 수 없게 된 가수들을 휘하로 끌어들인 분과가 바로 예능이다. 가수들이 예능의 인재풀이 된 것이다. 가수도 예능에 나와야 뜨고, 노래도 예능에 나와야 뜬다. 아이돌은 아예 예능 진출을 위해 최적화된 가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음악 실력을 갈고 닦는 것보다 예능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같다. 그리하여 예능에서의 가수 활약상은 눈부시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프로그램 이름을 ‘가수 결혼했어요’라고 바꿔도 될 만큼 가수들 천지였다. 솔비, 앤디, 알렉스, 크라운제이, 서인영, 손담비, 환희, 화요비, 황보, 김현중, 조권, 가인, 유이, 김용준 등이 나온 것이다. 국민 예능 프로그램인 <1박2일>에도 무려 다섯 명의 가수가 등장한다. 이렇게 많은 가수들이 예능에서 활약하는 것을 두고 ‘가수들의 전성시대’라고 평가하는 기사들까지 등장했다. 말도 안 되는 평가였다. 가수가 노래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예능에서 웃음이나 팔고 있는데, 어떻게 전성시대란 말인가? 대중음악이라는 분과가 독자성을 상실하고 예능에 종속돼 인재풀로 전락한 것에 불과하다.
가수들뿐만이 아니다. 개그맨들도 개그, 코미디 프로그램에서의 성공에 만족을 못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간택되기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으로 떠서 예능 프로그램에게 간택되면 자신의 본업인 개그 코미디 무대를 떠나는 게 기본적인 공식이 됐다. 개그 코미디 분야도 예능의 인재풀로 전락한 것이다.
마치 과거 제국이었던 제1세계의 프로리그가 제3세계를 인재풀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인재들을 한 명씩 차출당하면서 제3세계의 리그는 독자성을 상실하고 제1세계 리그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된다. 대신에 차출된 제3세계 인재는 스타가 되고 화려한 보상을 받는다.
바로 이것처럼, 예능이 제국이 되어 여타 분야를 인재풀로 거느린 예능 패권주의의 시대를 열고 있다. 장동건 같은 연기 부문 대스타를 제외한 모든 분과의 연예인들이 예능을 바라보는 해바라기가 됐다. 이 구조의 정점에 선 것이 바로 유명 MC들이다. 그래서 과거엔 유명MC가 그저 유명MC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유명MC에게 ‘국민MC'라는 칭호가 헌정된다. 현재 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은 유재석, 강호동이다. 그래서 ’유·강 천하‘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이다. 2008년에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강호동이 받은 것은 이런 시대를 상징하는 삽화였다.
- 웃으면 그만이 아니다 -
예능은 응용파생분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가수, 배우, 코미디언 등이 각각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성과를 풍성히 내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능도 풍성해지는 것이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하겠다. 지금처럼 예능이 혼자 폭주하며 각각의 기초 분과들을 압박하는 것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각각의 기초 분과에서 중요한 것은 창조성과 장인적인 능력이다. 기초 분과가 활발히 발전해야 창조성과 전문성이 깊어져 한국 대중문화의 수준도 장기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반면에 예능에서 중요한 것은 순발력, 재치, 패러디 같은 응용 능력, 개인기 따위들이다. 모든 대중문화인이 전문적인 능력을 뒤로 하고 이런 것들에만 함몰된다면 우리 문화의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예능이 각각의 전문 영역 위에 군림하는 지금의 구조는 말하자면,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금융적으로 말한다면 현물 위에서 폭주하는 파생상품의 거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거품은 결코 지속가능한 발전의 토대일 수 없다. 그러므로 예능제국의 융성은 한국 대중문화의 적신호로 봐야 한다.
-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겠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 원인을 지목할 수 있다. 첫째, 시장이 황폐해졌다는 것. 둘째, 정신이 황폐해졌다는 것. 이 두 가지 요인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예능 대폭발을 초래했다.
첫째, 시장의 황폐화는 이런 얘기다. 외환위기 이후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한국인이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 가처분 소득은 아이 교육비와 부동산 관련 비용으로 다 빨려 들어간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제대로 된 문화상품을 소비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대중문화상품을 소비할 여력이 있는 집단으론 10대와 20대가 남았을 뿐이다.
그 10대의 주머니를 노리고 기획된 가수들이 바로 아이돌이다. 아이돌 이외의 가수들은 설 자리가 없다. 20대의 데이트 비용에 기대 연명하는 것은 한국 영화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에 데이트를 즐길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문화가 무너져 내리는 환경에서도 영화만큼은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10대와 20대의 주머니도 점점 가벼워진다. 10대의 용돈은 통신비용으로 빨려 들어가고, 20대는 등록금과 취업 준비비용 때문에 부채를 짊어지고 있다. 문화상품이 정상적으로 소비될 여유가 점점 축소되는 것이다. 물질적 여유가 없으니 TV오락프로그램이나 보며 즐겨야 한다.
이렇게 되면 살 길을 못 찾은 대중예술인들은 그나마 자신들의 끼를 펼칠 수 있는 예능으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예능을 통해 유명세를 얻으면 제한적인 시장에서나마 살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능에서 유명세를 얻으려면 창조적 능력과 개성을 죽이고 재치만 극대화해야 한다. 결국 대중예술인이 먹고 살기 위해 예술적 창조성을 스스로 죽여야 하는 구조가 된다.
둘째, 정신의 황폐화는 이렇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인이 얻은 건 불안과 우울증이다. 자살률이 치솟고 있다. 이렇게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예술이 다 무슨 소용인가? 예술이고 인문이고 모두 소멸될 지경이다. 대중은 그저 한 순간 시름을 잊게 해줄 수 있는 강렬한 자극, 복잡하게 머리 쓰지 않아도 저절로 주입 되는 쾌감만을 원할 뿐이다.
그리하여 순간적인 자극을 주는 것들이 발전하는데, 그것이 바로 막장드라마와 예능 오락프로그램이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최근 10여 년 사이 입시경쟁이 극단적으로 심화됐다. 이젠 초등학생 때부터 밤까지 학원에 다녀야 한다. 강요받는 것은 오직 경쟁뿐이다. 이런 환경에서 문화를 향유할 정신적 여유가 생성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저 아이돌에 매달리고 예능에 몰두하며 즐기는 것이 최고인 줄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 게시판에서 아이돌과 예능을 소재로 격투를 벌이며 오늘도 하루를 보내고 있다.
결국 예능의 비정상적인 질주는 한국의 대중문화가 병들어가는 징후인데, 그것의 원인은 대중문화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바깥에, 바로 사회와 교육의 붕괴에 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해법도 대중문화인의 각성 따위가 아닌, 사회와 교육의 정상화에 있을 수밖에 없다. 국민과 학생들이 물질적, 정신적 여유를 누리며 문화를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한국의 대중문화도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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