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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낸시랭 민폐퍼포먼스가 민망한 이유

 

낸시랭이 모처럼 대박을 쳤다. 영국에서 물의를 빚은 사건이 한국에 알려지며 한 포털의 검색순위 1위에 오르고, 댓글 순위에서도 1위에 올랐다. 마케팅으로 치면 정말 성공적인 마케팅이다.


내용은 이렇다. 그녀가 영국 여왕의 생일 퍼레이드에 난입해 여왕에게 접근하려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성공하지 못했고, 그후 퍼레이드 행렬 곁에서 퍼포먼스를 하다가 경찰의 거듭된 제지를 받았으며 결국 공항으로 강제이송당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해도 너무한다. 결과적으로 낸시랭이 남의 나라 여왕까지 자신의 마케팅에 이용한 모양새다. 여왕은 영국의 상징이다. 그런 여왕의 퍼레이드라면 그 나라에선 대단히 중요한 행사일 것이다. 그런 행사에 억지로 끼어드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무례’다.


만약 한국에서 어떤 상징적인 행사를 하는데 미국의 연예인이 끼어들었다면 우리는 어떤 기분일까? 당연히 불쾌할 것이다. 누구라도 타국의 의례는 존중해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낸시랭의 소속사 측은 ‘낸시랭의 퍼포먼스가 영국과 사전 협의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에피소드가 벌어진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낸시랭 측이 이렇게 중요한 타국의 행사에 끼어들기 위해선 그 나라의 당국과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는 걸 몰랐을까?


그럴 리가 없다. 위에 말했듯이 이건 상식중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 상식조차 갖추지 못했다고는 믿기지 않는다. 추측컨대 아마도 일부러 그랬을 것이다. 경찰에 의해 제지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래서 물의를 빚을 거란 걸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을 거라는 얘기다.


때문에 앞에서 낸시랭의 마케팅에 영국 여왕이 이용당한 모양새라고 한 것이다. 대단히 성공적인 노이즈 마케팅이었다. 낸시랭은 또 한번 떴다. 하지만 남의 나라에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이슈를 만드는 것이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최근에 한 월드컵 응원녀가 아르헨티나 국기에 발자국이 찍힌 디자인의 옷을 입고 한국을 응원하다가 네티즌의 비난을 받았다. 우리나라를 응원하고 응원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해 왜 남의 나라를 모욕하느냐는 질책이었다. 타국을 존중하지 않으면 이렇게 보는 이를 불쾌하게 한다. 낸시랭의 이번 영국파문도 그렇다.



위에서 난 ‘미국의 한 연예인’이라는 예를 들었다. 낸시랭은 예술가로 알려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을 예로 든 것은 낸시랭이 예술가이기보다는 섹시함과 이슈 터뜨리기로 활동하는 연예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순수)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추구해왔다. 현대에 들어서서는 아름다움보다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대체로 그 의미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 고발, 자본주의 사회 비판, 상업주의와의 투쟁, 권력에 대한 저항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운운했던 낸시랭도 이런 현대 예술의 경향을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포지셔닝하는 것 같다.


현대 예술은 기존에 정형화된 코드를 부수거나, 비웃거나, 그것에서 일탈한다. 반면에 철저히 기존의 코드에 영합하며 돈과 명성을 좆는 분야가 있다. 상업예술이 그렇다. 상업예술은 파열음을 내지 않고 자본과 권력과 대중의 기호에 영합한다.


낸시랭은 섹시화보를 방불케 하는 노출 이미지로 떠서, 예능프로그램에서 적절한 리액션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의 활동은 순수예술이 아닌 상업예술에 더 가까워보인다. 즉 연예인에 가까워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위에 연예인을 예로 든 것이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예술행위라면 이번처럼 권력과 충돌하는 퍼포먼스를 감행한 것을 어느 정도 이해해줄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왜 굳이 남의 나라 권력이었어야 하느냐라는 짜증은 남는다. 아무리 예술을 한다고 해도 타인/타국에 대한 존중을 잃으면 안 되니까.


낸시랭은 그것도 아니고, 노이즈마케팅하는 연예인처럼 단지 본인을 이슈로 만들기 위해 남의 나라 행사에 난입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특히 볼썽사납다.


연예인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난 연예인도 좋아하고 상업예술도 좋아한다. 낸시랭에게는 연예인의 자질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솔직하게 연예계 인사로 활동했으면 좋겠다. 예술의 허울을 쓰고 있는 것은 민망하고, 이번처럼 예술의 허울로 ‘막가파 민폐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은 더욱 민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