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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싸인은 윤지훈을 왜 죽였을까

<싸인>이 끝났다. 주인공인 윤지훈이 죽었다. 아쉽다. 윤지훈이 마지막에 죽을지 모른다는 풍문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길 바랬다. 주인공이 죽으면 우울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싸인>이라는 드라마의 분위기가 막판에 주인공이 죽을 만큼 그렇게 어둡지도 않았으니까.

윤지훈의 죽음은 확실히 튀는 면이 있다. 그가 그 살인자를 검거하기 위해 꼭 목숨을 버려야 했는가가 납득이 안 된다. 이 세상에 심증은 확실하나 물증이 없어 처벌하지 못하는 범죄자들이 허다하다. 그때마다 수사관이나 법의관이 자기 목숨을 던져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면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건 중에 굳이 이 사건에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던지려면, 대단히 강력하고 필연적이며 특수한 동기가 제시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의 심적 변화가 치밀하게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약했다. 그래서 죽음이 튄다는 이야기다.

자신을 사랑하는 고다경을 남겨둔 상태라서 더 그렇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질기게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 때문이다. 혼자뿐일 때와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이엔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런 사람을 남겨두고까지 자기 목숨을 버릴 때는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저 진실과 정의를 위한 법의관의 충정이라는 막연한 동기로는 이 '특수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

막판에 윤지훈은 살인자가 자신을 죽이도록 유도하고 그것을 동영상으로 찍어 범인이 잡히도록 했다. 그걸 혼자 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했으면, 죽이도록 유도는 하되 자신은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가 독약을 타고 숨을 못 쉬게 하는 모습을 찍은 것으로 유죄 입증이 충분하니까. 아니면 대화를 통해 지금까지의 범죄사실을 모두 자인하도록 하고 그것을 녹음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인>는 윤지훈을 죽였다. 왜 그랬을까?


- 한국사회를 부검하다 -

<싸인>은 시신을 부검하는 법의관들의 이야기다. 수많은 시신들이 '진실'을 위해 부검되었다. 그 부검작업은 시신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싸인'을 듣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이었다.

그런 <싸인>의 과정 전체를 통해 부검되었던 대상이 있다. 바로 한국사회다. 그 부검작업의 정점을 장식한 것이 윤지훈의 죽음이고, 그것을 통해 <싸인>은 시청자에게 '싸인'을 보내는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

<싸인>은 한 아이돌 가수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알고 보니 그 뒤엔 가수를 확고히 통제하려 하며,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고, 돈만 아는 소속사 사장이 있었다. 그 뒤엔 굴지의 엘리트 로펌이 있었다. 그와 함께 검찰 등 공권력이 일제히 모의했다. 그리고 그 뒤엔 최고의 정치권력이 있었다.

정치권력은 막강했다. 모든 증인, 증거를 하나하나 없애갔다. 드라마 <싸인>은 증거와 증인이 차례차례 없어지는, 그래서 우리 현실에선 그 검은 권력의 실체를 더 이상 밝혀낼 길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가는 기나긴 과정이었다.

<싸인>에는 또 다른 성역도 나왔다. 바로 미군이었다. 미군이 저지른 범죄는 권력기관들의 모의를 통해 이 땅의 민초에게 너무도 쉽게 전가됐다. 권력은 '한미동맹'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또 다른 성역도 있었다. 자본이다. 매값폭행을 일삼는 자본이 사람을 죽이고도 대로를 활보하는 모습이 <싸인>에 그려졌던 것이다. 윤지훈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진실의 메스를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싸인>이 부검했던 건 한국사회였다.

- <싸인>이 보낸 싸인 -

그가 죽어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싸인>은 목숨을 건 시민의 용기가 아니고선 도저히 한국사회의 진실이 드러날 수 없다는 '싸인'을 보내려 한 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싸인>은 차근차근 보여줬다. 또 자기 일신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소시민들의 행동이 결국 진실의 은폐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도 보여줬다.

그리하여 <싸인>은 단언했다. 목숨을 건 용기, 그것 외엔 방법이 없다고. 그럴 만큼 한국사회는 어두운 상황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무섭다. 이렇게 무서운 드라마였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싸인>의 내용과 윤지훈의 죽음이라는 구도가 이런 메시지를 전해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서두에 설명한 내용들 때문에 윤지훈의 죽음에 극적인 필연성이 떨어졌고, 그에 따라 감동이 2% 떨어진 것이 아쉽다. 죽음을 선택하기까지의 심적인 과정이 조금만 더 치밀했더라면 훨씬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