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년 사이엔 ‘개그콘서트’가 유행어 집중생산기지 역할을 했다. ‘감사합니다다람쥐, 사람이 아니무니다, 궁금하면 500원’ 등을 유행시켰는데, 이건 그동안 ‘개그콘서트’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는 걸 말해준다. 다른 방송사에서도 코미디 프로그램을 했지만 이렇다 할 유행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2012년에 한국영화가 1억 관객을 돌파하면서 호황을 누렸는데, 영화 대사를 유행어로 만든 것이 최근 한국영화의 저력을 말해준다. ‘어떡하지’, ‘살아있네’ 등이 그 주인공이다. 최근에 꽃중년 열풍이 거셌는데, 그것은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한 걸로’라는 말투의 유행으로 나타났다. 90년대 복고의 한복판에 있었던 ‘응답하라 1997’은 ‘응답하라 ****’라는 식의 제목 뽑기를 유행시켰는데, 이것으로 이 드라마가 사회에 미친 파장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유행어를 통해 우린 당대 트렌드를 읽어낼 수 있다. 과거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같은 표현들이 국민의 사회적 불만을 그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사회적 표현이 영화나 드라마쪽으로 가면서, 개그 유행어는 상대적으로 큰 의미 없는 말장난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이 지난 1년간의 기본적인 분위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크게 터진 유행어에는 역시 사회적 의미가 담겨있다.

 

 

 

 

◆한국인은 왜 ‘고뤠’에 반응했을까?

 

김준현의 ‘고뤠’를 여러 매체들이 최근 1년 사이 최고의 유행어로 뽑았다. 상대적으로 무명이었던 김준현은 ‘고뤠’의 히트로 가히 인생역전을 이뤘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인이 ‘고뤠’를 뜨겁게 사랑했던 것이다.

 

‘고뤠’는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나왔는데, 원래는 김준현이 주 캐릭터가 아니었다. 주 캐릭터는 따로 있고, 김준현은 잠깐 한 마디 할 뿐이었는데 정작 국민은 주 캐릭터가 아닌 ‘고뤠’에 반응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몸집도 큰 김준현이 위압적인 군복 차림으로 강하게 명령한다. ‘내 말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그런데 곁에 있던 비서가 ‘그러면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어서 안됩니다’라고 딴지를 건다. 그러자 김준현은 바로 ‘고뤠? 안 되겠지?’하면서 겸연쩍게 자리에 앉는다. 이게 다다. 한국인은 왜 이런 싱거운 설정에 그리도 강하게 반응한 것일까?

 

여태까지 ‘고뤠?’하는 지도자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대 모든 정권에 나름대로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그 어느 정권 관계자도 속시원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교묘한 논리로 자기합리화에 골몰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지난 대선 때도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주요 후보들이 모두 어떤 문제점들을 지적 받았었는데 누구도 ‘고뤠?’하면서 쿨하게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벼랑까지 밀려서야 마지못해 사과하는 모습이었고, 이런 관례는 국민을 답답하게 했다.

 

또 한국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나라였다. 윗사람이 뭔가를 지시하면 아랫사람은 일단 달려들어서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토를 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파는 짓이다. 윗사람은 일단 자기가 방침을 발표하면 밑에서 아무리 반대해서 밀어붙이는 걸 능사로 알았다. 잘못을 인정하면 기싸움에 지는 거라 여겼다.

 

이런 분위기에서 ‘고뤠’는 충격이었다. 김준현은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상징인 군복을 입고 나왔다. 체구도 커서 고압적 리더십의 이미지 그 자체였다. 그런 사람이 비서 한 마디에 즉시 ‘고뤠? 안 되겠지?’하면서 주저앉는 모습은 사람들의 가슴을 뻥 뚫어줬다.

 

 

 

◆소고기 사묵다가 화가 난다

 

지난 연말엔 ‘소고기 사묵겠지’가 큰 인기를 모았다. 이건 세상 다 산 것처럼 보이는 노인이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그러면 뭐 하겠노, 좋다고 소고기 사묵겠지. 그러면 또 뭐 하겠노’하면서 냉소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이런저런 희망을 걸어봤지만 결국 서민의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지 않는 세상에 대해 느꼈던 허허로운 심정이 ‘소고기’에서 터졌다. 진정한 희망을 경험해보지 못한 애처로운 국민들의 심장을 ‘개그콘서트’가 꿰뚫은 셈이다.

 

최근 '개그콘서트‘에선 ‘화가 난다’는 표현이 나타나 인기를 끌고 있다. 박성호가 ‘앵그리버드’로 분장하고 나타나 말끝마다 ‘화가 난다’고 소리치는 내용이다. 그가 화가 난다며 소리칠 때마다 통쾌한 느낌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한국인이 지금 실제로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현역병이자 연예사병인 비의 열애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은 ‘화가 난다’며 아주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별로 비에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도, 어쨌든 분노를 터뜨릴 대상이 필요했던 네티즌은 앞뒤 가리지 않았다. ‘화가 난다’는 바로 그런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앞으로 지도자가 ‘고뤠?’하면서 국민의 마음을 그때 그때 받아주지 않으면, 국민은 ‘소고기나 사묵’으면서 체념하다가, 그게 쌓여 울화가 되면 ‘화가 난다’며 화풀이를 하는 형국이 반복될 것이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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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의 현실을 풍자하는 유행어네요.

    잘 보고가요.

    즐거운 한 주 되세요.

    믹시가 말을 안 듣네요.ㅎㅎ

  2. 공감가는 글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처럼 우리나라가 좀 더 변하길 희망해 봅니다^^

  3. 물타기 그만요 2013.01.21 18:14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은근슬쩍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을 또 하나로 묶어서 나쁜 정치인으로 만들었네요 더 나쁜 경우는 있어도 똑같이 나쁜 경우는 없어요 자꾸 하나로 묶어서 몰아가는 물타기 그만하구요 솔직히 잘못이 지적되면 끝까지 버티다가 지지율 떨어질거 같으면 사과하는건 박근혜였고 안철수 문재인은 말 그대로 북풍같은 네거티브 공작만 당했는데 왜 사과해야합니까? 은근슬쩍 패키지로 하나로 묶지 마세요 이것도 일종의 세뇌공작이니까

  4. 제 생각엔 거지의 품격도 나름 생각할 게 있던데요

    뭐랄까요? 현대인에겐 거지 신분으로 추락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그런데 난 아직 거지는 아니라는 안도감, 혹은 거지가 되더라도 저렇게 살면(비현실적이만) 나름 당당하게 여자도 꼬실수 있고 인간다운 느낌으로 살 수 있다는 어떻게 보면 패러다이스 같은 휴머니즘마저도 느껴지던데요. ㅋㅋ

  5. 음.. 세대가 너무 급하게 변해서인지 개그콘서트의 코너는 호불호가 확실해요. 웃긴건 나만 웃기고 남이 웃기다는 건 전혀 안웃기고 말이예요....

    • 울리는 건 대충 다 비슷하게 느껴도, 웃기는 건 받아들이는 개인차가 크죠. 그래서 코미디언은 세계적인 스타가 되기 힘듭니다.

  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7.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예전에 정치인이 이 프로 고소해서 그 때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젊은 사람들 트렌드를 잘 읽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나이드신 분들이야 앵그리버드가 뭔지 알게 뭐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