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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위대한 드라마 모래시계와 촛불세대

 

위대한 드라마 모래시계와 촛불세대


 오월이 다 지나고 유월이 됐다. 우리에게 오월과 유월은 무엇일까. 봄날인가? 초여름인가? 어린이날인가? 어버이날인가? 전쟁기념의 달인가? 그런 보편적인 가치나 반세기 전 사연 말고, 오월과 유월은 한국현대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월과 유월은 1980년대를 상징한다. 1980년대는 오월 광주에서 시작해 유월 항쟁으로 끝났다.


 여기서 말하는 80년대란 폭압의 80년대를 의미한다. 한국인의 눈과 귀와 입이 막혔던 시절을 의미한다. 그 폭압은 오월 광장에서 시작해 유월 광장에서 막을 내렸다. 처음엔 불법시위대가 군부세력에게 졌고, 나중엔 불법시위대가 이겼다. 그리고 이른바 87년 체제가 시작됐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다.


 2008년 오월은 특별했다. 올해 오월엔 또다시 광장이 열렸다. 또다시 불법시위대가 등장했다. 공안대책회의가 등장하고 경찰체포조가 돌아왔다. 날마다 서울 도심을 점령해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일반인 시위대의 물결이 촛불의 불꽃으로 환생했다.


-위대한 드라마 <모래시계>-


 <모래시계>는 단지 시청률이 높았던 한 드라마가 아니다. 이 드라마는 역사적 사건이었고 한 시대였다. ‘모래시계 세대‘라는 말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이 드라마는 시대를 갈랐다.


 <모래시계>를 통해 최민수, 고현정, 이정재는 대스타가 됐다. <모래시계>의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라는 대사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모사된다. 올해 촛불을 들고 나온 신세대는 이 대사의 출전을 모르면서 TV에서 보고 있을 것이다. <모래시계>는 당시 직장인의 귀가시간을 앞당겼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엄청난 화제를 낳았다. 모래시계 주인공과 이름이 같은 한 의원 출마자가 드라마 주제가를 하루 종일 틀어대며 드라마 이미지로 선거운동을 했을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래시계>는 기본적으로 재밌었다. 영화를 방불케 하는 영상은 한국 시청자들에게 충격이었다. 한국 드라마는 인물대화로 모든 걸 채웠었다. <모래시계>는 영상 그 자체도 말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줬다. 그것은 센세이션이었다.


 하지만 재미와 영상미만으로 그 엄청난 성공을 설명할 수 없다. 재미와 영상미를 갖춘 성공작은 그 후에도 꾸준히 생산됐다. 그런 드라마들을 일컬어 ‘국민드라마’라 한다. <모래시계>는 일개 국민드라마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아 전설이 되었다. 단지 재미있는 작품은 망각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모래시계>엔 다른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시대의 암흑을 걷어낸 진실의 울림이었다. 독재세력이 강요한 눈 막고, 귀 막고, 입 막고 살았던 세월을 <모래시계>가 안방극장에 열어젖혔다. 권력이 강요한 금기를 깨고 우리가 살았던 세상의 진실을 그려낸 것이다. 그것이 <모래시계>를 위대한 드라마로 만들었다.


 <모래시계>에서 80년 광주가 그려졌을 때 시청자가 느낀 건 전율이었다. 단지 시청률이란 계량적 지표로 환산할 수 없는 깊은 충격이었고 카타르시스였다. 굴곡 많은 현대사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이 많은 민족이다. 뭔가 막혀있던 것이 터지는 순간 한국인의 가슴은 공명한다. <모래시계>는 1980년대의 심연을 그려줬다. <모래시계> 이전에도 서민의 일상사를 다룬 드라마는 많았다. 그러나 금기를 뛰어넘진 못했다. <모래시계>는 결국 자기 자신이 역사가 되었다. 1980년대, 그 폭압의 시대는 386세대와 <모래시계>를 남겼다.


-다시 드리워진 금기의 그림자-


 <모래시계>가 나온 때는 김영삼 정부 중반기였다. 그때는 87년 이후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무르익어가는 시기였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을 거치면서 이 나라에선 군사독재가 완전히 종식되고 직선제가 정착된다. 87년에 시위대가 요구했던 것이 바로 대통령직선제였다.


 김영삼 정부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군사독재를 무너뜨린 바로 그때, 국가권력이 이완된 바로 그때, 새로운 권력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건 바로 시장권력, 자본권력이었다. 한국인이 군사독재에 치를 떨며 <모래시계>를 보고 감격했던 순간에 역사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정부는 탈규제, 개방, 자유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외환위기라는 파탄을 맞았다. 그러나 그 기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게 그대로 이전됐고, 이명박 정부에게 계승됐다. 한미FTA는 김영삼 정부 탈규제-개방-자유화 기조의 완성을 의미한다.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쇠고기 문제가 결국 광장에 다시 사람들을 불렀다.


 누구를 위한 탈규제, 누구를 위한 자유화일까? 그건 지난 3대 정권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돌이켜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양극화와 재벌집중의 심화. 서민이 얻은 건 민생파탄의 고통뿐이다. 자유는 시장에서 자유롭게 경제행위를 할 자유를 의미한다. 미국산 쇠고기도 한국산과 자유롭게 시장경쟁해야 한다. 규제는 없다. 이런 시장경쟁에선 절대로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없다. 강자는 점점 더 경제력이 집중된 강자가 되어 마침내 절대권력이 된다.


 1980년대처럼 노골적인 검열과 통제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진 않는다. 이것이 87년 항쟁이 얻어낸 성과다. 그러나 경제적 강자들의 통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모든 매체가 자본에 대해 자기검열을 행한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드라마가 나올 수 없다. 예능에서도 독재를 비판하는 말은 종종 나오지만 시장과 자본은 성역이다. 이제 경제적 권력자들은 교과서마저도 자신들 입맛에 맞도록 바꾸려는 중이다.


- 두 번의 오월, 두 번째 모래시계는?-


 젊은 세대는 김영삼 정부 이후 자유화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자리를 잃었고, 그럼으로써 미래를 잃었고, 대신에 현재의 고통을 얻었다. 김영삼 정부 이래 자유화 개혁으로 비정규직이 늘어나 현재 20대 이하 세대는 태반이 평균임금 88만 원 수준으로 생활해야 한다. 재벌은 극단적으로 채용인원을 줄였다. 젊은이들을 받아줄 중소기업은 고사지경이다.


 현재의 고통이란 경쟁의 고통과 교육비의 고통이다. <모래시계>가 방영된 때는 1995년이다. 그해에 김영삼 정부의 자유화 교육개혁안이 나왔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정책의 뿌리가 바로 1995년에 있다. 그때부터 경쟁이 심해지기 시작해 사교육비가 급등했다. 이번에 뛰쳐나온 학생들은 학교자율화 파동 등으로 경쟁의 공포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또 대학자유화로 등록금이 뛰어 대학생들도 현재의 고통에 빠져들었다.


 이 모두가 시장에서 자유롭게 벌어지는 일들이다. 입시경쟁하라고 강요하는 독재권력도 없고 등록금 올리라고, 비정규직 채용하라고 강요하는 독재세력도 없다. 시장원리라는 권력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모든 파탄상을 조종한다. 2008년 촛불세대는 1980년대를 모른다. 이들은 90년대 이후 자유화, 시장화에 신음하며 큰 세대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의 인기 드라마는 여전히 사극, 트렌디, 줌마렐라, 중산층 전문직물 일색이다. 시청률 높은 작품은 많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대가 처한 시대의 심연을 드러내 주는 위대한 드라마는 없다. 1980년 오월 386세대에겐 <모래시계>가 있었다. 2008년 오월 촛불세대에겐 자신들의 <모래시계>가 아직 없다. 자본과 시장의 금기를 걷고 촛불세대가 사는 세상을 적나라하게 그려줄 21세기판 <모래시계>. 이젠 그런 것이 나올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