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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대통령께 사극몰입교육을 시켜주자

 

대통령께 사극몰입교육을 시켜주자


 최근 몇 년 사이 사극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정통사극, 퓨전사극, 판타지사극 등 종류도 다양하고, 월화 미니시리즈, 수목 미니시리즈, 주말 드라마 등 편성도 다채롭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방영되는 족족 시청률도 한 결 같이 높은 수준이다. 대한민국이 사극에 빠져버렸다.


 <대왕세종>엔 ‘정치’라는 대사가 수시로 등장한다. <대왕세종>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의 사극들은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다. 그것을 궁중치정, 권력암투를 중심으로 그린 경우도 있고, 왕이나 장군의 치적을 중심으로 그린 경우도 있다. 특히 세상을 잘 다스렸거나, 어지러운 세상을 안정시켰거나, 민족적 위기를 극복시켰거나, 뭔가 큰일을 한 위인의 이야기는 국민적 사랑을 받는다.


 우리 국민들이 지금의 현실에서 느끼는 불안감, 불만족감이 과거의 지도자들에 대한 추앙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최근 추앙 받은 지도자들은 동명성왕(주몽), 광개토대왕(태왕사신기), 대조영, 이순신장군, 장보고 등이 있다. 요즈음엔 정조와 세종대왕이 조명 받고 있다. <쾌도홍길동>도 비록 정치지도자는 아니나 대중이 지도자에게 바라는 그 무엇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선 같은 맥락 속에 있다.


 한국인은 지금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2007년 대선에 직선제 실행 이후 사상최대의 표차가 벌어진 건 그런 위기감의 발로였다. 위기에서 탈출할 강력한 리더십에 국민이 일단 표를 몰아준 것이다. 국민은 현재를 일종의 비상시국으로 느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 임기 초 사상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사회가 이렇게 불안정하다. 지지율이 극에서 극으로 춤을 춘다.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사극의 리더십엔 그런 비상시국을 안정시키고픈 대중의 바람이 담겨져 있다. 위에 언급한 지도자들에게서 한국인은 최근의 위기를 탈출할 그 무언가를 봤던 것이다.


 드라마 <주몽>은 주몽과 대소의 대립구도로 짜여 있다. 여기서 대소는 철저한 위계문화, 기득권향유, 군림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대소의 리더십은 양극화와 국가적 예속을 초래했다. <주몽>에서 그려지는 고조선 유민의 처참한 모습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 비정규직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대소는 그런 고조선 유민을 희생시키면서 부여 지배층만의 부유함을 위해 한나라와 결탁한다.


 주몽은 고조선 유민과 인근 군소부족 전부를 포함해 모두가 다 함께 잘 사는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문제가 생기면 견위치명, 솔선수범의 정신으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 주위에 따르는 무리들과 수평적 신뢰의 리더십을 공유한다. 그러자 야철대장 모팔모를 비롯해 수많이 인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국가가 중흥된다. 주몽이 자기 국민들에게 준 건 ‘신바람’이었다. 신명나게 살 수 있는 나라. 국가적 과업에 신바람 나게 동참할 수 있다는 자부심. 아무도 배제당하거나 차별당하지 않는 공동체. 그것을 준 리더십이 백성의 헌신을 이끌어냈다.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대왕인 담덕과 호개의 차이도 유사했다. 호개는 대소처럼 자신과 몇몇 대귀족의 안위를 위해 일반 평민과 타부족의 생명을 가벼이 여겼다. 또한 타국의 세력과 결탁하기까지 했다. 담덕은 고구려의 모든 백성, 그리고 타부족 모두를 아우르는 공존공영의 비전을 제시했다. 담덕 역시 솔선수범과 수평적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병사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백성으로서 소중한 존재이니 그 누구도 헛되이 희생당해선 안 된다는 분명한 공동체적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공동체적 리더십이 살아있을 땐 양극화 사태가 일어날 수 없다. 소수가 잘 살기 위해 다른 국민들이 비정규직으로 희생해야 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 리더십 형태는 근본적으로 반인륜적이다. 거기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이런 사극을 찾고 있다.


 <대조영>에서 대조영과 부기원 등의 대립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부기원 등은 자기들 대귀족만 잘 살자고 백성의 안위를 우습게 생각했으며, 타국에 몸을 기댔고, 위계적, 특권적 행태를 보였다. 그에 반해 대조영은 적군이었던 흑수돌, 이민족인 걸사비우 등과 호형호제하며 호방한 개방적, 수평적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백성을 자기 몸처럼 생각했으며, 병사들이 희생당했을 때 오열했다.


 우리나라는 멀쩡한 기업들이 기업수익성 제고한다면서 노동자들의 상당수를 어느 날 갑자기 잘라버린다. 그 노동자들의 빈 그림자를 딛고 상층부는 안락을 누린다. 요즘 대통령은 공공부문 노동자 자를 궁리를 하고 있으며 돈 없는 국민들에게 미제 쇠고기를 먹이려 하고 있다. 잘린 노동자들한테야 미제 쇠고기도 감지덕지다. 돈 많은 사람들은 저희들끼리만 한우 먹겠지만.


 이런 모습에 진저리를 친 한국인들이 병사 하나하나의 희생에 오열하는 대조영의 리더십을 보며 감동했던 것이다. 대조영은 병사에게 이상한 고기 먹이고 자기만 혼자 1억 원짜리 특등 품질 한우 먹지 않았다. 전장에서 대조영은 병사와 같은 걸 먹었다.그리고 단 한 명도 버리지 않았다.


 대조영의 그런 리더십은 일본 자동차회사 토요타의 리더십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토요타의 회장은 노동자를 자르려거든 경영자가 먼저 할복하라면서 인명을 소중히 여기는 리더십을 설파했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 장군과 지배층들도 비슷한 리더십의 대립을 보여줬다. 이 드라마에서 지배층은 자신들의 부귀영화, 안전은 전혀 포기하지 않으며 백성들만 사지로 내몬다. ‘그들도 이 나라의 백성이오’라면서.


 그에 반해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에 부임해 양반과 양민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에게 엄정한 군기를 부과한다. 어떤 양반이 그에 항의하자, “이 나라가 어디 종복과 양민들만의 나라라던가!”라며 준엄한 표정을 짓는다. 양극화와 특권,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리더십이었다. 이순신을 핍박하는 대신들은 화려하나 비루하게 보였고, 불철주야 조선 백성의 안위만을 염려하며 특권을 무시했던 이순신은 위대해보였다. 바로 이런 것이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 원하는 리더십이다.


 <이산>에서도 이런 흐름이 그대로 이어진다. <이산>에선 정조와 노론이 대립한다. 노론이 당시의 귀족세력이었음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그들이 시전상인과 결탁해 백성의 먹고 살 길을 가로막자 정조는 백성을 위해 노론과 척을 진다. 그 때문에 고난을 겪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기득권 세력과 대립하며 소외됐던 서얼들을 중용한다.


 <이산>에서 영조가 어린 ‘꼬맹이 정조’에게 임금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묻는다. 꼬맹이 정조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다 백성들이 올린 언문 상소를 모조리 읽고 백성들이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는다. 임금이 해야 할 일의 일 순위가 백성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임을 꼬맹이 정조는 몸으로 보여줬다.


 꼬맹이 정조는 언문 상소를 읽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위급한 상황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구한다. 이 일을 안 영조는 관원들에게 ‘너희들은 그동안 뭘 했느냐’며 진노한다. 관원들은 언문상소를 무시했던 것이다. 언문상소를 무시한 관원들을 영조는 모조리 파직해버린다.


 백성들에게 ‘언문’이라는 문자를 마련해준 이가 <대왕세종>의 세종대왕이다. 그가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당시 사대부들은 이를 반대했다. 한자라는 외래문자 사용을 고집함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직접 호소할 ‘한글’을 쥐어주고 만다. 타국의 문자에 짓눌리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려 한 것이다.


 <쾌도 홍길동>에서는 부패한 재상이 청나라 물건을 탐하고, 재물을 축적한다. 홍길동은 부정한 양반의 재산을 서민들에게 분배한다. 그런 홍길동을 원수처럼 여기는 재상은 청나라 말을 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언문밖에 모르는 서민들은 홍길동에게 환호한다.


 사극을 보면 우리 국민들이 지금 어떤 정치지도자를 원하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 분명한 사실을 외면할까? 영어가 한글의 지위를 추월하려 하고 있다. 영어실력은 대체로 재산순이다. 외국어를 통해 국민이 분리된다. 이명박 정부는 먹는 음식도 분리하려 하고 있다. 양민은 미제 쇠고기, 양반은 국산 쇠고기. 또 재산이 많은 사람들이 권부를 독차지하고 있다. 고소영, 강부자 내각은 사극 속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통령님께 사극몰입교육을 시켜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