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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대왕세종과 ‘손목아지’


 

대왕세종과 ‘손목아지’


 ‘대왕세종’이 ‘그럭저럭’ 방영되고 있다. ‘그럭저럭’이라고 한 것은 이 드라마가 이렇다 할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 수준의 시청률이면 나무랄 데 없는 성적이긴 하지만 이것이 대하사극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하사극은 드라마왕국인 한국에서 시청률 보증수표였다. ‘주몽’, ‘이산’의 엄청난 성공과 ‘대조영’이 받았던 조명에 비하면 ‘대왕세종’의 존재감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대왕세종’과 ‘대조영’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시청률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몽’, ‘이산’, ‘대조영’의 키워드는 ‘창업’과 ‘대결’이다. 그에 반해 ‘대왕세종’의 키워드는 ‘수성’이다. 예로부터 말을 타고 광활한 영토를 점령하기는 쉬워도 통치하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시청자의 관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대결과 승리엔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나라를 건실히 꾸려나가는 수성의 이야기엔 무관심이다.


 주인공의 카리스마도 다르다. 고주몽이나 대조영에 비하면 세종은 ‘맹탕’이다. 시청자가 감정이입할 만한 강렬한 매력이 없다. 실제 역사상으로도 고주몽, 대조영, 정조는 그 인생 자체가 드라마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도 드라마였다. 그에 반해 세종 치세는 태평성대였다. 개가 사람을 물어야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사람이 사람답게 평화롭게 사는 이야기는 ‘맹탕’일 뿐이다.


 나는 ‘주몽’, ‘대조영’보다 ‘대왕세종’이 냉대 받는 현실이 아쉽다. 만주벌판을 내달리는 ‘주몽’, '대조영‘이 호쾌, 통쾌, 상쾌하긴 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만주벌판 말달리자’가 우리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나? 물론 반도에 갇힌 백성으로서 호방한 기상을 갖는 게 좋은 일이긴 하다. 민족의식 고취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여기 우리나라의 문제는 대륙경영에 있지 않다. 우리의 문제는 국가경영에 있다. 국가경영이 따분한 주제이긴 하지만 국민이 이것에 대해 치열하지 않으면 국가가 표류하게 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국가지도자들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더욱이나 국민이 국가경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드라마틱한’ 시대보다 심심한 태평성대를 사는 게 당사자들에겐 더 행복한 일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조선이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세종대왕의 경영은 흘려버릴 수 없는 이야기다. 드라마 ‘대왕세종’은 그것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게 된다. 제작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종대왕의 치세를 주제로 한 이상,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풍부한 변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드라마다.


 나는 수용자로서 그 속에서 우리 현실에 필요한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시청한다. 이런 ‘적극적 시청’ 행위는 드라마를 보는 제3의 재미를 안겨준다. 풍부한 이야기를 담은 다른 사극들이 그렇듯이 ‘대왕세종’에도 적극적으로 해석할 만한 대목들이 많다. 장영실이 그 한 주제다.


- ‘손목아지가 바로 목숨이야!’ -


 드라마 속에서 장영실은 신분차별과 배타적인 지배층들의 태도에 실망, 왕조에 반감을 갖는다. 고려왕실복위군에 가담했다가 체포돼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가 된다. 그는 반란군에 대한 진술을 강요받으나 거부한다.


 이때 고려말에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그의 솜씨를 알아보고 그를 지키려 한다. 최해산은 군기감에서 일하며 조선 방위산업의 최고기술자격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그는 단식하는 장영실에게 밥부터 챙겨 먹인다.


 “아 얼른 먹어 임마! 기술자는 배곯고 다니면 못써. 뱃속이 든든해야 머리도 잘 돌고 머리가 돌아야 그 머리통 속의 기술 신나게 세상에 내놓지.”


 하지만 장영실은 단호히 거부한다.


 “차라리 내 손을 자르라 하세요.”

 “야 임마, 너 미쳤냐? 죽고 싶어 환장했어?”

 “손 날라간다고 사람 안 죽어요.”

 “넌 죽는 거지, 임마. 기술자한테는 손목아지가 바로 목숨이야. 몰라!”


 장영실이 빨리 자복하지 않으면 왕자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최해산은 왕자목숨보다 장영실을 감싸고돈다.


“제겐 군왕보다 이 화약내 나는 방 한 칸에서 얻는 기술 하나가 더 중합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 기술 하나가 국가의 흥망을 가른다. IMF 사태가 나기 전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동아시아 경제기적이 사상누각이라고 비웃었다. 양적 투입에 의한 경제성장일 뿐 생산성 향상이 없었기 때문에 곧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생산성은 기술력이 뒷받침돼야 향상시킬 수 있다. 기술경쟁력에 국가경쟁력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극 중에서 최해산은 세종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실이란 놈한테 방 한 칸 만들어주십시오. 마마께서 그 방을 지켜줄 튼실한 지붕만 돼주신다면, 저 녀석 그 귀한 재주를 가진 손이 조선에 진짜 필요한 손이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귀한 재주를 가진 손’은 왕자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우리 현실에서 ‘귀한 재주를 가진 손’의 주체는 기술자와 노동자들이다. 우리 국민이 귀한 재주의 손을 가진 노동자가 될 때 한국은 세종대왕의 치세 이상으로 반석 위에 설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기술자와 노동자는 신종 천민이다. ‘대왕세종’에선 천민의 신분적 굴레조차 ‘귀한 재주의 손’이 개화하는 걸 막지 못한다. 우리 현실은 기술자와 노동자를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천민으로 만든다.


 새로운 사대부는 영어귀족, 경영경제학귀족, 미국유학자, 의사, 변호사들이다. 나라의 기풍이 흔들리고 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일제고사, 학교자율화, 대학자유화 등으로 입시경쟁을 강화시켜 ‘귀한 재주의 손’이 아닌 ‘달달달 외운 지식의 머리’들로 이 나라 지배자들을 채우려 한다.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 학위를 한 인재들의 귀국비율이 5공 때보다도 떨어졌다. 두뇌유출은 OECD 최상위권이다. 국내는 학벌사회, 간판사회의 차별시스템이다. ‘귀한 재주의 손’이 들어가 마음껏 능력을 펼쳐야 할 부품소재 중소기업은 하청의 설움 속에 비명을 지른다. 대기업, 재벌만 활개 치게 하는 탈규제 자유화 광풍이 불고 있다.


 수출제일주의 무역총동원을 표방했던 박정희는 왜 영어전사를 육성하지 않고 공고를 강력히 육성했을까? ‘기술’과 ‘손’에 한국의 미래가 걸렸다. 그러려면 세종이 장영실에게 ‘튼실한 지붕’이 돼줬듯이 우리 기술자, 노동자들에게 국가가 지붕이 돼줘야 한다. ‘대왕세종’엔 장영실, 최해산 그리고 활자개발자, 명나라의 학사 등 기술자들의 활약이 비중 있게 등장한다. 우리 현실은 정반대다. 자기 아들을 기술자로 키우려는 부모가 없는 나라는 희망도 없다.


 나는 ‘대왕세종’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국민의 자식들이 모두 장영실이 되면 좋겠다.’ 국가가 장영실을 키워야 한다. 장영실을 배제하는 풍토는 혁파해야 한다. 학력경쟁, 영어회화가 아니라 ‘손목아지’가 이 나라의 미래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시청하면 ‘대왕세종’도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