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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배철수의 팝송타령 절대공감



 최근 배철수가 ‘무르팍도사’에 밝힌 고민은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에 나왔던 고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고민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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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철수는 청소년들이 팝음악을 너무 안 듣는 것이 고민이라고 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대중문화에 있어서 사활을 건 고민꺼리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아이들이 듣는 가요는 대부분 ‘쓰레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쓰레기라는 표현은 음악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최근 몇 년 사이 괴성을 몰고 다니는 가수들 중에 진짜 음악을 하는 음악인이 있나? 음악인이라기보다 연예인이라는 것이 더 어울린다. 음악은 연예활동의 한 방편일 뿐이다.


 노래? 못 불러도 된다. 춤? 노래보다 중요하다. 외모? 가장 중요하다. 입담? 어쩌면 이게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 가수 지망생이 성형, 다이어트, 춤연습에 몰두하고 개인기를 갈고 닦는다. 노래로 뜨면 예능으로 진출이다.


 즉, 목적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수단으로서의 음악이다. 목적이 아니고 수단인 음악이므로 음악적 가치로 봤을 때는 가치 ‘0’, ‘쓰레기’다. 연예인이 꿈인 사람이 기획사에 들어가 기획사가 맞춰준 컨셉을 소화할 뿐인 것이다.


 진정성으로 보자. 요즘 가수들 중에 확실한 자기 장르 가지고 있는 가수 있나? 없다. 힙합이 유행하면 힙합하다가 일렉트로니카가 유행하면 일렉트로니카한다. 자기가 추구하는 음악을 한 결과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트렌드에 맞춰 기획된 상품을 맞춤생산-판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적 진정성을 기준으로 봤을 때도 역시 ‘쓰레기’다. 즉, 무가치인 것이다.


 팝은 다르다. 물론 같은 잣대로 보면 팝도 쓰레기 천지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음악만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때로 인기를 얻기도 하는 곳이 팝시장이다. 그래서 팝음악은 한국 가요보다 훨씬 다양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 우리 가요가 가난해져간다 -


 우리 가요시장은 점점 더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은 문화적 창조성이 말살돼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과거에 문화종다양성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멸해가는 문화적 다양성을 살리기 힘들다. 그런 식이 아니라면 팝음악, 월드뮤직 방송쿼터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지금의 인기가요만으로는 한국은 음악적으로 너무 가난한 나라가 된다. 문화적 풍요가 넘치는 문화대국이 아닌, 문화적 빈곤국이 되는 것이다. 제헌절을 맞아 우리 헌정의 의미를 조망하는 글들이 많이 나왔지만, 사실은 이런 대목이야말로 우리 공화국이 지향하는 바를 되돌아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문화가 풍부한 공화국. 이것이 우리 모두의 바람 아닌가?


 강호동은 배철수에게 ‘우리 가요가 그만큼 좋아진 것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건 1990년대까지만의 이야기다. 그때 한국 가요의 사운드는 팝을 따라잡았다. 거기까진 좋았다. 어찌된 일인지 곧 퇴보가 시작됐고 아이돌 천지가 됐다.


 남은 건 팬클럽의 괴성뿐이다. 얼마 전엔 팬클럽끼리 알력다툼을 벌이다 공연장에 침묵이 찾아오는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그 사태는 팬클럽 파시즘이라는 평을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이 사라진 곳에는 파쇼적 획일성이 기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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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철수가 팝음악을 열심히 듣던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며 사대주의적인 팝송타령을 한 것이 아니다. 배철수는 20세기 팝음악은 단지 영미음악이 아닌 문화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팝음악은 미국노래가 아닌 보편문화다. 우리는 이것을 아직 덜 소화했다.


 일본은 팝음악을 완전히 소화해 자기 것으로 재창조하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만든 일렉트로니카가 한국식으로 수입된 것이 ‘클래지콰이’고 그것이 한번 더 한국화한 것이 최근의 일렉트로니카 열풍이다. 손담비, 빅뱅 등 수많은 가수들이 너도 나도 가세했는데 그 귀결은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식 ‘나이트클럽‘ 음악이었다. 귤이 한국땅으로 들어오니 탱자가 된 것이다.


- 널리 경험하고 깊이 배워야 한다 -


 배철수는 지금의 한국 영화 전성기를 만든 사람들이 모두 헐리우드 키드였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세계 최첨단 영상문화의 세례를 받은 덕분에 세계적인 수준의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영미문화를 보고 배우는 것은 결코 사대주의가 아니다. 그건 학습이고 재창조의 과정이다. 미제 대중문화는 미제 쇠고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프랑스의 ‘누벨바그’도 헐리우드 키드들이 만든 것이었다.


 장 뤽 고다르는 헐리우드 갱영화의 틀을 가져다 ‘네 멋대로 해라(A Bout De Souffle, 1959) ’를 만들었고, 그것이 다시 미국으로 역수입돼 리처드 기어가 나오는 ‘브레드레스 (Breathless, 1983)’가 됐다. 이렇게 문화는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우리 가요만 듣는다고 좋은 일이 아니다. 지금의 가요 독주 현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경험이 단순해지고, 단순한 경험의 수용자들은 깊은 문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팝음악 매니아들이 너도나도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던 1970년대의 음악들을 요즘 ‘7080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다. 이 콘서트를 보면 당시 음악들이 얼마나 세련됐었는지 놀랍기 그지없다. 그 풍부함, 그 실험정신, 그 장인정신, 그 반항정신, 그 음악적 오기 등은 다 사라지고 화려한 소비문화만 남은 것이 지금의 소위 ‘인기가요’판이다.


 ‘7080콘서트’를 진행하는 배철수가 팝송실종 사태를 우려하는 것을 단지 세대차이라고 돌릴 수만은 없다. 물론 이런 문제의식을 듣고 ‘이제는 팝인가보다, 이제는 팝을 들어야 하나보다’라며 모두가 팝 앞으로 달려든다면 또 다른 획일성이 생긴다. 다양성과 외부문화 수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다. 모두가 따로 또 같이 어우러져야 한다.


 ‘가요도 듣고, 영미팝도 듣고, 그 외 음악도 들어야 한다‘ 가 정답이다. 우리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아닌 ’국악‘으로 제한된 이른바 ’국악‘을 비롯해, 세계의 음악에 귀를 열어야 한다. 그래야 이곳, 한국에서 세계적인 음악적 창조가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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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적의 차원에서 여러 나라의 음악과 함께, 장르의 차원에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일부러 듣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문제의식을 배철수가 ‘팝’이라는 단어를 빌려 표현했다고 믿는다. ‘무릎팍도사’에서 배철수는 20세기 최고의 음악인이 비틀스라고 했는데,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따를 필요는 없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최고 음악인이 있는 것이 문화적 풍부함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선 특정 장르, 특정 가수가 천하를 제패한다. 팬클럽은 마치 유일신교도들처럼 자기가 믿는 가수가 최고라며 다른 팬클럽과 조직적으로 반목한다. 그렇게 대립하는 가운데 음악적 차이는 없다. 모두 비슷한 구성의 음악을 한다. 아니, 비슷한 패턴의 ‘연예활동’을 한다.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팝의 전성기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