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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무한도전특집이 망해서 얻은 것

 

MBC <무한도전>이 2일 방영한 여름특집 ‘28년 후’는 재난을 당했다. 블록버스터급 물량투입으로 2회 편성까지 노렸으나, 1회분 분량도 건지지 못한 참혹한 결말이었다. 결국 제목이 극 중에서 ‘28분 후’로 ‘급’ 수정됐다.


시청률도 15.7%로 7주 만에 최저시청률을 기록했다. 제작진은 자신들이 현재 경위서를 작성 중이라는 자막으로 작품실패를 자인했다. 그리고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읍소했다.


언론들은 이를 두고 비난하는 논조의 기사를 내보냈다. 제작진의 무성의함, 무책임함 등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한 언론은 아예 방영을 하지 말든지, 방영을 할 거면 재촬영을 하든, 내용을 수정하든 해서 완성도 있는 작품을 내보냈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깨진 작품, 시청자의 외면, 언론의 비판. 골고루 망했다. 적어도 ‘28년 후’라는 특집만큼은 확실히 망했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망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무한도전>은 매주 방영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은 이른바 리얼버라이어티를 표방한 프로그램이다. 만약 제작진이 ‘28년 후’를 어떻게든 조작해서 완성도 있는 작품으로 재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그때부턴 ‘리얼’이 아니게 된다.


시청자는 <무한도전>을 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실제상황’이라는 전제 하에 감정이입에 들어간다. 프로그램 진행 중에 출연자들이 당황하고, 두려워하고, 고생하는 것들이 모두 작위적인 연기가 아니라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깨지면 감정이입도 깨진다.


만약 영화라면 실패한 작업물을 개봉할 순 없다. 영화는 준비하는데 시간이 너무나 오래 걸린다. 시장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다음 작품을 못 만들게 될 수도 있다. <무한도전>은 어차피 매주 방영되기 때문에 한 번의 실패 정도는 감수할 여유가 있다.


‘28년 후’에서 <무한도전>은 실패를 감수했지만, 동시에 이 프로그램이 정말로 ‘리얼’이라는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아무리 야심찬 기획과 엄청난 물량이 투입됐어도 현장에서 ‘앗’ 하는 사이에 허무하게 무너질 수도 있는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시청자에게 각인시킨 것이다.


그 수많은 아쉬운 순간들 때문에 운동경기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치와 같다. 운동경기를 보면 져선 안 될 사람이 지곤 한다. 실력이 월등하고 투입한 노력도 많은 사람이 어이없는 실수나 경기장 상황의 문제로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수록, 사람들은 운동경기가 우리의 삶과 같은 ‘실제상황’이라고 인식하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운동경기에서 모든 것이 합리적으로 매끄럽게 진행된다면 아무도 운동경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피파랭킹대로 월드컵순위가 결정되면 월드컵을 누가 보겠나? 월드컵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예측불가한 불합리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측가능하지 않은 것이 바로 ‘실제상황’이다. 운동경기, 우리의 삶 그리고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모두 예측가능하지 않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실제상황’을 표방하면서 사실은 작위적인 연출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왔다. 시청자들 모두가 이런 의혹을 공유하면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인식할 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한 감정이입이 깨진다.


멤버들이 돈가방을 서도 뺏을 때 그것이 돌발상황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밌는 것이지, 만약 사전에 정해진 각본대로 연기하는 거라면 3류 시트콤에 불과하게 된다. 이번에 <무한도전>은 ‘28년 후’에 들인 노력과, 제작진의 기획, 그리고 현장에서 벌어진 상황에 의해 모든 것이 무너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서 시청률은 놓쳤으되 ‘리얼’에 대한 신뢰를 쌓았다.


이것은 매주 계속해서 방영될 <무한도전>의 토대를 쌓은 것과 같다. 똑같은 구성이라도 정해진 각본이라고 생각하면 맥 빠지고,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롭다. 시청자들은 이제 <무한도전>이 정말로 실제상황에 가깝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엄청난 물량과 야심찬 기획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모든 것이 무산되는 건, 운동경기가 보여주는 실제성과 닮았다. 그런 실제성은 긴장감과 희열, 감동이라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토대가 된다. ’28년 후‘의 실패는 <무한도전>에 그런 드라마가 가능하도록 정지작업을 한 효과가 있다.


유재석도 프로그램 중에 보이는 지나친 소심함, 겁많음 등이 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아왔다. 이번에 공포에 질려 프로그램 진행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소품을 망가트림으로서 그것이 ‘리얼’이라는 신뢰를 줬다. 프로정신으로 유명한 ‘MC유’가 야심찬 기획을 망쳤을 땐, 정말로 겁을 집어먹었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말하자면 죽어서 산 것이다. 프로그램 한 편 좌초하고 길게 가져갈 수 있는 토양을 얻었다. 물론 그 토양 위에서 얼마나 좋은 결과를 빚어낼 것인가는 아직 결정 되지 않았다. 다음 운동경기의 결과를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예측불가능성 자체가 거대한 ‘리얼’의 일부분이다.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이 다음엔 성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