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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권정생 선생과 존엄한 가난

 


 원고청탁과 함께 ‘존엄한 가난’이란 화두를 받았다. 존엄한 가난이라. 물질소유가 계급의 기준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가장 비천한 것이다. 존엄은 반대로 최상위의 어떤 가치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말은 형용모순인 것도 같다.


 소설 <개미>에 보면 어떤 개미가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개미들끼리 전쟁을 치른 결과 개미들의 시체가 즐비한 상황이다. 그 광경을 본 개미의 탄식이다. ‘하늘도 이 처참한 모습에 눈물을 흘릴 것이다.’ 워낙 오래 전에 본 소설이라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그 순간에 비가 왔던 것도 같고 안 온 것도 같은데, 어쨌든 개미가 그 광경을 하늘도 슬퍼할 비극으로 인식했던 것은 분명하다.


 정말 개미들끼리 싸우다 죽으면 하늘이 슬퍼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사람은 개미들끼리 싸우는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미들끼리 싸우다 죽든 말든 사람의 관심 밖의 일이고, 그에 따라 사람의 하늘도 개미의 죽음을 슬퍼할 것 같지는 않다. 사람이 믿는 하늘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개미가 아닌) 사람만이 존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개미시체들에 대해선 비극성을 느끼지 않지만, 사람시체에 대해선 무한한 비극성을 느끼는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하늘은 과연 사람의 죽음을 정말로 슬퍼할까?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추측컨대 아마 별로 개의치 않을 것도 같다. 하늘의 입장에서 보면 개미나 사람이나 다를 것이 없을 테니까. 결국 인간존엄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의미 있는 가치다. 여타의 존재가 인간을 존엄하다고 여기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


 사람이 느끼기에 개미는 존엄하지 않은데 사람은 존엄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어야 할까? 개미도 생명이고 사람도 생명이다. 생명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존엄하다면 이 세상 모든 생명이 존엄하다. 그것은 아무 것도 존엄하지 않은 것과 같다. 언제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은 법이니까. 물론 절대적 진리의 차원에선 모든 것이 존엄하다는 논리가 통할 수 있다. 그러나 난 지금 현실사회의 차원에서 묻고 있다.


 사람은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다. 사람은 선택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태어난 본능대로만 행동한다면 사람 행동에 대한 가치 판단은 무의미하게 되고, 생명의 절대적 존엄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성된 존엄성은 사라지게 된다. 태어난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다 하는 것이므로, 개미와, 내 몸 안의 암세포와, 나의 실존은 똑 같이 존엄하게 되고, 사람에게 ‘가난한 존엄’ 따위의 별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배고픈 사자, 도토리를 많이 모아두지 않은 다람쥐는 존엄한가?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사람에게만 ‘존엄한 가난’이라는 가치가 부여되는가? 그것은 바로 사람만이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가난이란 말로 상징되는 것은 이기심의 포기다. 동물은 이기적이다. 시장주의 경제학에서 보는 사람도 이기적이다. 모두 자기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 그 이기심의 싸움에 져서 가난해진 경우를 일컬어 존엄한 가난이라고 하진 않는다. 존엄한 가난이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이기심, 즉 먹고자고싸고소유하고살고 싶은 욕망의 굴레를 벗어던질 때 획득되는 것이다.


 나를 위해 먹고, 나를 위해 자고, 나를 위해 싸고, 나를 위해 소유하는, 즉 타자와 대립하는 ‘나’라는 감옥을 깨치고 타자와 어우러지는 나를 위해 이기심을 버린 사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기적이지 않은 경제주체는 공동체의 경제번영에 해가 된다는 것이 경제주의자들의 사고방식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경제주체에게 이기적이 되라고 촉구한다.(정부가 국립대법인화를 추진하는 것처럼) 그런 경제주체만이 이익을 챙길 수 있다. 이기심을 버린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람의 존엄성은 사람의 선택 외에, 또 정신성의 측면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본능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에서 벗어난 정신성의 영역이야말로 존엄성이 근거할 수 있는 또 다른 터전이 된다. 대체로 이런 쪽도 물질적 부와는 거리가 멀다. 이 외에도 몇 가지 다른 방식으로 존엄성을 조명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에 공통되는 관점은 자기 자신을 위해 부를 쌓는 행위를 존엄하다고 판단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악덕사채업자가 가장 존엄할 테니까.


 이 글은 고 권정생 선생과 관련하여 ‘존엄한 가난’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것이다. 청탁을 해온 잡지는 권정생 선생의 삶을 존엄한 가난이라고 표현했다. 난 권정생 선생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선생이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임에도 평생 가난하게 살았고, 유언도 인세를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남겼다는 사실 정도다.


 내가 만약 존엄하다면, 그건 내가 단지 생명이라서 존엄한 것이고, 나와 각종 세균 사이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왜냐하면 난 절대로 권정생 선생처럼 들어오는 돈을 내버리지 못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 이기심이라는 감옥 안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엔 그 감옥을 깨친 사람들이 간혹 존재한다. 인간은 바로 이런 삶을 선택할 가능성을 자기 안에 간직한 존재다. 그 가능성이야말로 인간존엄성의 조건이 된다. 그리고 존엄한 가난이란 그 가능성이 발현된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고 권정생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