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주가 출산장려금 100만 원을 받은 것 때문에 논란이 일고 있다는 기사가 어제 포털 메인에 뜨더니, 오늘 다른 포털에도 떴다. 김남주처럼 잘 사는 사람이 복지 혜택까지 덤으로 누리는 것에 사람들이 불만을 느끼는 것 같다.
연예계의 작은 해프닝같지만 사실은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아주 중대한 문제다. 우리 공동체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정은 이런 댓글이 잘 보여주고 있다.
‘불평등하고 형평성이 없는 정책 ... 수백억대의 재산을 보유한 사람에게 이제 둘째 낳았다고 백만 원을 복지정책으로 지급? ... 그 돈으로 진짜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해주어야 했었던 것 아닙니까.’
‘수백억대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 장난하나? 쓸데없이 예산을 낭비하는 그야말로 등신 같은 정책이다 ... 약자를 배려하는 문화가 조성되어야지...’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세금은 부자에게, 혜택은 서민에게‘ 이것이 상식적인 복지제도의 이념이다. 그러므로 복지혜택이 서민에게만 주어지길 바라며, 부자에게 가는 혜택은 통제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 인지상정에서 벗어나야 -
혜택이 서민에게만 주어지길 바라는 사고방식은, 당연히 책임을 부자들만 지길 원하는 쪽으로도 흐른다. 저소득층이 세금 내는 것에 분노하며, 부자가 복지혜택을 누리는 것에 분노하는 이런 인지상정을 깨야 한다.
서민도 부자처럼 부담하고, 부자도 서민처럼 혜택을 누리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무차별적 복지, 단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주어지는 ‘묻지마 복지’ 체제를 건설해야 한다.
부자와 서민이 갈리는, 즉 부담하는 자와 혜택 받는 자가 갈리는 체제는 언뜻 보면 정의로운 것 같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부담하는 자와 혜택 받는 자가 갈리면 부담하는 측은 언제나 불만을 갖게 된다. 반면에 기여 없이 혜택만 받는 사람은 모멸감을 느끼게 된다. 그 알량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 빈곤층임을 밝혀야 하고, 또 그런 사람들만 관련 기관에 드나들면서 ‘기생집단’이라는 주위의 시선을 감수해야 한다.
예전에 어느 학교에서 저소득층 급식보조를 받는 학생이 드러나도록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그 어린 학생은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서 혜택을 주는 복지는 결국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와 모욕감을 안겨주게 된다.
한편, 받는 것 없이 일방적으로 부담만 하는 사람들은 점점 불만이 쌓여 한사코 돈을 안 내려고 하게 된다. 그에 따라 복지재원이 마련되지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푼돈 보조나 하게 된다. 푼돈이나 받으며 빈민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을 보는 시선은 점점 차가워지고, 그런 사람들에게 내 돈을 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 복지제도는 그 존립을 위협받게 된다.
- 모두가 부담하고 모두가 혜택 받는 복지로 -
미국에선 복지혜택의 수혜자가 명백했다. 흑인 빈민들이다. 백인 중산층은 그들을 위해 부담하길 거부했다. 그래서 미국은 국가 의료보험 제도를 이룩하지 못했다. 모두가 부담하고 모두가 혜택 받는 것이 아닌, 있는 만큼 부담하고 있는 만큼 혜택을 누리는 의료체제가 된 것이다.
등록금도 그렇다. 미국은 학비가 비싸다. 대신에 학비보조 제도가 발달됐다. 부자들이 기부한 돈으로 가난한 학생들이 혜택을 받는다.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런 제도는 결국 양극화를 막지 못했다. 부자들의 지갑이 충분히 열리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집 아이들은 교육 받기를 포기하기 일쑤다.
노무현 정부는 국립대를 없애고 등록금을 올리려고 하면서 동시에 장학금 제도를 확충하겠다고 했었다. 미국식의 선별적 복지체제로 가려고 한 것이다. 이런 구조에선 김남주의 아이는 연간 3,000~5,000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빈민의 아이는 특별전형으로 들어가 장학금 지원을 받게 된다. 이때 상위 계층은 자기 자식 등록금을 부담하면서 동시에 빈민 학비지원금까지 이중으로 부담하게 되기 때문에 복지제도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반면에 서북부유럽은 모두가 부담하고, 모두가 혜택 받는 ‘묻지마 복지’체제로 갔다. 보육, 교육, 고용, 주거, 의료 등의 모든 부문에서 전 국민이 무차별적으로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산층은 자신들이 받는 혜택이 명백하기 때문에 복지제도의 지원군이 된다. 복지를 고리로 빈민과 중산층이 동맹을 맺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복지사회가 정치적으로 실현가능/지속가능하게 된다.
한국의 현실에서 부자의 복지혜택에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이미 말했듯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그런 불만에 함몰되면 결국 미국처럼 된다. 가난한 흑인 빈민들을 골라서 도와주며 동시에 사회적 낙인을 찍는 체제 말이다.
부자가 혜택 받는 것을 공격할 에너지를, 전 국민에게 더 큰 복지혜택이 무차별적으로 시행되도록 하는 데 써야 한다. 그렇지 않고 ‘부자 니들은 부담만 해, 복지혜택은 가난한 사람만 골라서 줘야 해’라는 인지상정에 머무는 한 한국은 복지국가가 되기 힘들다.
이번 사건에서 진짜 문제는 이런 것이다. 용산구에 사는 정혜영은 셋째 아이를 낳았는데 50만 원을 받았다. 그런데 강남구에 사는 김남주는 둘째를 낳았다고 100만 원을 받았다.(셋째일 경우 500만 원) 이게 뭔가? 지역 차별하나? 이런 식이면 재정이 어려운 지방의 복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국가가 전 국민에게 무차별적으로 제공되는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 복지를 각 지역에 떠넘기면 이렇게 된다. 김남주가 아니라 이것에 분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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