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알면서 당했다. <단비> 잠비아편 1회에서도 다 알면서 당했었다. 아프리카의 비참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감동 눈물 코드로 갈 거라는 걸 뻔히 알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프로그램과 함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2회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잠비아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켄트군이 마침내 가족과 상봉하는 장면, 그리고 감격적으로 지하수가 터져 나오는 장면에서 반드시 눈물을 쥐어짜게 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봤지만 결국 그 두 장면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완전히 다른 은하계나 다름없는 한국이란 나라로 온 켄트군에게 가족이란 얼마나 아픈 이름이었겠나. 목숨을 저당 잡히며 구정물을 먹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에게 맑은 물의 세례란 또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었겠나.
정공법의 위력이다. 워낙 호소력 깊은 이야기가 진정성을 바탕에 둔 이미지로 전개되기 때문에 감동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현지 주민들의 절박한 모습이 MC들과 시청자의 심장을 함께 쳤다.
그야말로 휴머니즘의 폭풍이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우리들 모두에겐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는 측은지심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단비>는 우리들의 그런 마음을 건드렸고, 날로 각박해지는 세상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것만 같았던 심장을 다시 뜨겁게 했다.
한 대학교의 학생들이 학교 앞 노점상들을 치우라는 운동을 전개한다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노점상들 때문에 학교 이미지가 지저분해진다는 이유였다. 단지 꼴 보기 싫다는 이유로 노점상들의 생계를 끊어놓으려고 한 것이다. 이런 기사를 보면 한국사회가 사이코패스 소굴로 변하는 것 같아 두려워진다.
<단비>의 뜨거운 눈물이 우리 사회에 내린 ‘단비’처럼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타자, 약자의 아픔을 보며 감동 받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마음은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 눈물의 단비가 내릴 때 우리 사회는 보다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무조건 선의와 감동만을 내세운 각종 감동유발성 착한 프로그램들에 비해 재미도 있었고, 진정성도 느껴졌다. 잊혀진 방송이었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모처럼 채널을 돌리게 할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지하수가 용솟음치던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그 드라마틱한 분출모습으로 미루어, 지하수가 예능을 아는 듯하다. ^^)
- 한지민 천사녀, 탁재훈 갱생남? -
<단비>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줄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지 상황의 절박함이다. 이것이 당연히 일등 공신이다. 하지만 절박한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이미 수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다 했던 일들이다. 그러므로 절박함 이외의 무언가가 더 작용해야 했다.
그것이 출연자들의 힘이다. 출연자들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연출해 프로그램을 너무 무겁지 않게 하면서도, 안타까움이 진실 되게 우러나는 표정으로 시청자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실마리 역할을 했다.
프로그램의 성공에 출연자들이 공헌한 셈인데, 거꾸로 이 프로그램은 그런 출연자들에게 막대한 이미지 개선효과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효과를 측량하기 힘들 정도다. 이것은 한지민과 탁재훈를 보면 분명해진다.
한지민은 한류 블록버스터라는 <카인과 아벨>에게서 얻은 것이 없었다. <단비>는 그런 대작도 주지 못한 효과를 단 2회 만에 한지민에게 선사했다. 한지민의 소탈하고 진실한, 비참한 아이들을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듯한 모습이 <단비> 잠비아 편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고, 인터넷에선 한지민을 칭송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이산>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정조의 여인 성송연 역으로 사랑 받은 후 기대를 모으며 합류했던 <카인과 아벨>은 그녀에겐 실패작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인과 아벨>의 수혜자는 소지섭뿐이다. 그렇게 2009년을 보내는 듯하던 한지민이 <단비>에서 정말 단비를 맞은 셈이다. 9회말 만루홈런이다.
탁재훈도 단비를 맞았다. 탁재훈은 깐족대고, 뺀질거리는 듯한 이미지 때문에 점점 미운털이 박혀가고 있었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여러 코너에 출연했었지만 그런 이미지를 뒤집지 못했다. <오빠밴드>도 역부족이었다.
그랬던 흐름이 <단비>에서 역전될 조짐이 보였다. 프로그램이 인간 탁재훈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인들과 함께 천진난만하게 어울리고, 또 함께 아파하는 모습은 이전에 연예인들에게 깐족대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한지민은 천사녀, 탁재훈은 갱생남이라고나 할까?
그 둘뿐만이 아니다. 김용만도, 김현철도, 안영미도 대체로 인간미를 느끼게 하는 캐릭터들이 아니었는데 <단비>가 이들의 캐릭터에도 단비를 뿌려주고 있다. <단비>가 계속해서 시청자의 가슴 속에 뜨거운 ‘단비’가 되고, 이들이 프로그램 속에서 그런 시청자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데 성공한다면 이들은 ‘대갱생의 단비’를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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