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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임윤택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임윤택에겐 항상 악플이 따라다녔다. 말기암이라는 병명이 거짓말이라는 악플이었다. 그가 마치 악질적인 거짓말쟁이라도 되는 듯 악플은 저주의 양상까지 보였다. 임윤택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갖은 증거를 대가며 임윤택의 거짓말을 확신했다.

 

항암치료를 받는 암환자들이 모두 같은 증상을 보이는 것은 아니며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는 반론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임윤택이 방송활동하는 것 자체가 거짓말의 증거라고들 했다. 그것 때문에 임윤택은 답답하다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임윤택이 죽음으로 암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그동안 임윤택의 거짓말을 확신하며 악플을 쏘아대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심경일까?

 

세상엔 다양한 삶의 양상이 있고, 모든 사람에겐 저마다의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알 수 없는 일이 태반이다. 그런데도 우리 네티즌은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확신하고 너무 쉽게 단죄한다.

 

옥주현, 엠시몽, 티아라 등등 사례는 부지기수다.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우린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적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다. 이런 세태가 우리 사회를 점점 더 황폐하게 만든다. 그것이 더욱 사람들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 집단적으로 공격할 대상을 찾아 화풀이를 해대는 형국이다.

 

임윤택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내다 갔다. 100%의 삶을 산 것이다. 모두가 이렇게 100%의 삶을 산다면 남의 꼬투리를 잡아 증오를 퍼부을 여유가 없을 것이다. 자기 삶을 방치하는 사람들이 남의 삶을 쉽게 단죄하는 법이다.

 

악플이 취미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이제와선 임윤택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의 표현 하나를 꼬투리 삼아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별세’라는 표현을 썼는데, 젊은 사람에게 별세라는 표현이 가당키나 하냐며, 죽음을 알리는 기사에마저 악플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별세든 뭐든 그 표현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우리 사회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남을 그리 쉽게 단죄해버릇하는 사람들은 조용힌 자문해볼 일이다. 혹시 내가 괴물이 된 것은 아닐까?

 

괴물이 별 게 아니다. 타인의 상처, 타인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도 자기가 잘못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괴물이다. 요즘엔 그런 사람을 일컬어 사이코패스라 한다. 우리 네티즌은 점점 사이코패스로 변해가는 것 같다.

 

타인의 아픔보다 자기 화풀이가 더 우선인 사람. 확증이 나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기보다 일단 욕부터 싸지르고 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보통 자기자신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정의의 사도쯤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다. 자신들의 악플이 이 세상의 악덕을 징치하는 포청천의 작두나 되는 양 의기양양하다. 이게 잘못됐다는 것부터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다.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연예인, 유명인, 다 마찬가지다. 누구나 맞으면 아프고, 상처가 나면 피를 흘린다. 그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이코패스 상태에서 벗어난다.

 

악플은 두더지 게임기를 때리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 대상은 피와 눈물을 가진 사람이다. 타인을 공격하기 전에 내가 그 입장이 되면 어떨까를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사회적 증오의 대상이 되면, 내 가족이 그렇게 되면 어떤 심경일까? 사람들이 내 진심을 몰라주고 공격만 해대면 얼마나 답답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 그리 쉽게 타인을 단죄하진 못할 것이다.

 

부디 임윤택이 다음 생에서나마 진심을 의심받지 않는 삶을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