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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이병헌도 못 살린 협녀, 흥행실패가 아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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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기대작이었던 <협녀, 칼의 기억>이 역대급 실패작으로 남을 전망이다. 극장가 최대 성수기인 여름시장에 개봉해, 12일간 41만 관객이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 그 특유의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존재감으로 작품을 떠받치는 대들보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병헌으로도 <협녀, 칼의 기억>의 침몰을 막을 순 없었다.

 

일각에선 이병헌의 구설수 때문에 관객이 등을 돌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관객은 출연자의 도덕성을 보고 영화를 선택하지 않는다. 관객은 오직 재미가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영화를 선택하는데, 그 선택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입소문이다. <협녀, 칼의 기억>의 입소문은 최악이었다.

 

 

이 작품은 의 가치를 내세웠다. 전도연은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사랑과 삶을 버리고 패륜적인 음모를 꾸민다. 김고은은 그 음모를 알게 된 후에도 협을 위해 패륜적 복수를 실행한다. 협녀이지만 정에 약한 어머니가 딸을 무자비한 진짜 협녀로 키워 인륜을 저버린 협행을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작품이 흥행하려면 이 이야기에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단 이병헌이 그렇게 죽일 놈인지부터가 표현이 제대로 안 됐다. 이병헌 하나 때문에 민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했고, 설사 민란이 성공해 무신권력자를 없앴다 하더라도 어차피 다른 무신이 집권할 터였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병헌이 한 짓이 무슨 그렇게 결정적인 죽을 짓이란 말인가?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려는 이병헌을, 관객 입장에선 두 협녀가 그렇게 증오할 만한 악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악인이 악인 같지 않으면 주인공의 협행이 무의미해진다. 전도연은 이병헌을 죽이자고 왜 자기 자식의 삶까지 망치는 것이며, 김고은은 왜 진실을 알고서도 엉뚱한 복수행에 나서는 것인지 공감이 안 된다. 무의미한 칼싸움일 뿐이다.

 

그 칼싸움마저도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무협영화에선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무술액션씬 그 자체의 시각적 쾌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협녀, 칼의 기억>의 무술액션은 이미 홍콩영화의 화려한 액션씬을 경험한 관객에서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과 행동, 공감할 수 없는 복수, 부담스러운 비장함, 무의미한 칼싸움, 이러니 아무리 이병헌이 명연기를 펼쳐도 관객 입장에선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한 마디로 <협녀, 칼의 기억>은 협녀의 협행을 관객에게 납득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러자 김고은이 협녀가 아닌 답답녀가 되고 말았다. 패륜을 저질러가며 이병헌을 죽이는 것이 왜 협행인지, 이병헌 하나 죽이기 위해 자식의 삶을 완전히 파괴해도 좋은 것인지, 이런 부분을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천만 <암살>에선 이경영 등을 죽이는 것이 왜 협행인지가 분명히 표현됐고, 액션의 시각적 쾌감도 잘 구현됐다.

 

<협녀, 칼의 기억> 흥행 실패가 아쉬운 것은 모처럼만의 한국 무협영화 부흥의 기회가 좌절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영화계는 무협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실패를 맛봐야 했다. 무협액션이 중국인들만의 전매특허는 아니지 않겠는가? 한국영화도 기회만 주어지만 무협이라는 장르를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협녀, 칼의 기억>이 흥행에 실패하면서 무협 부흥은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