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부장들’이 설연휴 극장가를 석권한 후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다.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기까지 마지막 40일 동안의 이야기를 그렸다. 영화는 실명을 피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대신 김규평(이병헌), 대통령 박정희 대신 그저 각하 박통(이성민), 전 중정부장 김형욱 대신 박용각(곽도원), 경호실장 차지철 대신 곽상천(이희준), 이런 식이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말기를 그렸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그 시절에 대한 평가가 정치세력에 따라 180도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역사왜곡 논란이 터졌다. 한 쪽에선 김재규가 유신을 끝장낸 거사를 했다는 점을 영화가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하고, 반대쪽에선 김재규의 권력욕심을 그리지 않아 결과적으로 김재규를 열사처럼 미화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영화는 김재규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다양한 관점을 냉정하게 그렸기 때문에 미화도, 평가절하도 아닌 종합적 묘사 정도로 보인다. 충신이었던 김재규가 왜 주군에게 총을 쐈는가를 추적하는데, 차지철과의 대립, 멀어지는 박정희의 신임, 미국의 압박, 숙청에 대한 두려움, 국민 학살에 대한 회의, 차기 권력에 대한 유혹 등 김재규에게 영향을 미쳤을 법한 여러 요소들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표현했다.
김재규를 민주투사로 기리기에는 그가 유신 시절 중앙정보부장으로 체제보위의 최일선에서 활동한 사람이라는 점이 석연치 않다. 반대로 김재규를 권력찬탈자로 단정 짓기에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이후 권력 장악 시나리오가 없다는 점이 석연치 않다. 찬탈자라면 중앙정보부로 가서 상황을 장악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김재규의 실체는 모호할 수밖에 없고 영화는 그런 모호함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묘사는 모호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 박정희는 하루종일 오로지 권력 유지만 생각하는 사람처럼 묘사된다. 낮에는 마치 중세의 성 같은, 어두컴컴한 청와대에 홀로 앉아 권력 유지에 골몰하고, 밤에는 안가 술상 앞에서 권력에 집중한다. 낮이나 밤이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오로지 권력욕 그 하나다.
그리고 자기의 명예, 이익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암시한다. 흑백TV를 왜 칼라TV로 바꾸지 않느냐는 질문에 영화 속에서 박정희는, 자기 얼굴이 흑백에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단지 자기 이미지 때문에 칼라TV를 막았다는 것이다. 박용각(김형욱)을 암살한 후엔, 박용각이 가지고 간 자신의 비자금을 회수했는지에만 관심을 보인다.
이런 묘사에 따르면 1년 365일 하루 24시간 자기 권력 욕심만 채우던 사람이 대한민국을 통치했다는 말이 된다. 이건 말이 안 된다. 그런 지도자가 통치하는 나라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
박정희 시절 경제발전이 종교라고 했을 정도로 박정희는 경제성장에 열정을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 말기엔 중화학공업이 위기를 맞고, 방위산업과 우리 군사력 증강에 대해 미국과 첨예한 마찰을 빚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이런 이슈에 대해서도 많은 에너지를 투입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또, 육영수 여사 빈소에서도 공무원들의 새마을운동을 챙겼을 정도로 새마을운동에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어두운 방에 홀로 앉아 낮이나 밤이나 개인 권력욕심에만 골몰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칼라TV를 수출하면서도 국내 출시를 막은 이유는, 국민 위화감을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 박정희 측근이 회고한 바 있다. 박정희 때 선택과 집중으로 경제성장이 1차 성과를 이루었는데, 그 때문에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해졌다. 아직 자가용을 가진 중산층이 형성되기 전이었다. 칼라TV를 보면 부유층의 생활상이 부각되고 그래서 서민들의 위화감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관점은 고려하지 않고, 그저 박정희가 개인 이미지만 신경 썼다는 식으로 그렸다.
박정희가 오직 비자금 회수에만 신경 쓰는 모습으로, 그가 사익추구에만 골몰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도 편향된 관점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국익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며 자동차, 조선, 제철 산업을 발전시킬 이유가 없었고, 미국과 마찰을 빚어가며 방위산업을 육성할 이유도 없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입체적인 김재규 묘사와는 달리 박정희 묘사는 과도하게 단순하다는 느낌이다.
반대로 박정희 미화라고 볼 대목도 있다. 박정희가 마지막 술자리 빼곤 계속 막걸리만 먹는다는 점, 개인 향락적 요소가 전혀 없고 오직 정치 이야기만 한다는 점, 술상과 술자리도 소박하게만 그려진다는 점 등이 그렇다. 마치 이덕화 주연의 ‘한명회’에서 한명회를 소박한 정치지도자로 미화했던 일이 떠오른다. 우국 지도자와 철혈 독재자, 극과극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던 박정희를 입체적으로 그리는 것은 아직 힘든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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