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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베토벤 바이러스가 남긴 것들



1. 강마에


< 베토벤 바이러스>는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강마에'라는 희대의 캐릭터를 남겼다. 강마에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될 것이다. 김명민은 복 받은 배우다. '이순신', '장준혁', 그리고 '강마에'까지. 이렇게 강렬한 캐릭터를 여러 차례 연기하는 기회도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양동근은 여러 차례 성격이 강한 역할을 맡았었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캐릭터는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 하나뿐이다. 드라마가 웬만큼 히트해도 캐릭터 이름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경우는 드물다. 소지섭은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지만 극 중 캐릭터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천년지애>에서의 역할 이름도 생각이 안 난다. 김명민은 '복수'에 버금가는 폭발력을 가진 캐릭터를 벌써 세 개나 갖게 됐다. 그 중 '강마에'를 <베토벤 바이러스>가 남겼다.


이것은 물론 단순히 운만은 아니다. 강마에를 다른 배우가 연기했을 경우에도 과연 지금처럼 폭발력 있는 캐릭터가 됐을 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강마에를 치명적인 매력을 내뿜는 괴력의 캐릭터로 만든 건, 온전히 배우 김명민의 능력이다. 대본상으로만 보면 단순한 악인 캐릭터였을 수도 있었던 것을, 김명민이 입체적인 캐릭터로 창조해냈다.


강마에는 히딩크처럼 하나의 리더십의 표상이 됐다. '강마에라면 어떻게 할 것이다', '강마에는 이런 식으로 했다', '왜 우리 정치인들은 강마에처럼 못하나' 하는 방식의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고, 앞으로도 나올 것이다.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은 '표상'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문화도 풍성해진다. 우리의 기억이, 추억이 풍부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강마에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이야깃거리를 보탰다. 수많은 드라마가 방영되지만 모든 드라마가 이런 캐릭터를 남겨주는 건 결코 아니다. 이야말로 <베토벤 바이러스>가 남긴 가장 큰 것이라 할 만하다.



2. 가능성


두 번째는 클래식 같은 정적인 소재로도 인기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최초 기획 당시 냉소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클래식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 누가 선뜻 투자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날고 긴다는 자극적인 내용들도 판판이 깨져나가는 냉정한 세상이다. 정적이고 비대중적인 고전음악을 소재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건 모험이었다.


게다가 경쟁작이 하나는 사극 스펙터클이었고, 또 하나는 박신양과 문근영이라는 대스타의 복귀작이었다. <베토벤 바이러스>엔 이 정도의 대중스타가 나오지도 않는다. 이 드라마가 경쟁작들을 누르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성공했다. 그럼으로 해서 한국 드라마의 소재의 폭을 넓혔다. 앞으로 대스타도 없으면서 정적이고 전문적인 소재의 드라마 기획안이 밀쳐질 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성공했는데...'


한국 드라마가 천편일률적인 소재에, 스타캐스팅이라는 함정에 빠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얻은 건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단지 재밌는 드라마 한 편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생긴 '가능성'이다. 한국 드라마는 보다 풍부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했다.



3. 희망


아주 많은 시청자들이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위안을 얻었다. 이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꿈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평범하고 익숙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는 메시지이지만, 사람들은 이 메시지에 감동했다.


고등학교 중퇴자, 고졸자, 직장 퇴직자 등이 꿈을 찾아가는 과정은 각박한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보여줬다. 주부들은 극 중에서 이름을 잃은 '똥덩어리' 주부가 클래식 연주자 '정희연'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며 열광했다.


강건우가 연주를 포기하고 다시 경찰로 돌아가려 할 때, 강마에는 꿈을 버릴 거냐고 독설을 퍼부었다. 강건우는 결국 꿈을 이루기 위해 경찰을 그만 둔다. 이 에피소드에서 자신도 꿈을 잃지 않을 힘을 얻었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야기 자체는 통속적이다. 꿈이 어쩌고 하는 내용의 드라마는 부지기수다. 하지만 사람들은 <베토벤 바이러스>에 공명했다. 이것이 <베토벤 바이러스>라는 드라마의 힘이다. 그리하여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 '희망'을 남겼다.



4. 자신감


< 베토벤 바이러스>가 처음 시작 됐을 때 일본드라마의 아류작이라는 비난이 많았다. 우리나라는 근대화 후발주자이며, 산업화 후발주자이므로, 당연히 서양식 대중문화도 일본보다 늦게 받아들였다. 우리 산업화가 1차적으로 일본모방이었던 것처럼, 서양식 대중문화도 일본모방을 통해 발전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일본문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다.


미국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다. 미국은 본토다. 미국 대중음악과 같은 장르의 가요만 나와도 표절시비가 붙는다. 콤플렉스의 표현이다. 클래식 드라마라고 다 같으란 법이 없는데, <베토벤 바이러스>가 클래식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드라마 아류작이라는 비난이 나왔던 것도 그런 콤플렉스의 발로였다.


< 베토벤 바이러스>는 철저히 토착화된 우리의 이야기로 그런 비난을 일축하는데 성공했다. 드라마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일본드라마 모방론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우리 서민들의 이야기를 클래식에 접합시킨 구성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다.


이것은 선진국에서 잘 만드는 전문직 드라마도 한국의 이야기를 녹여내 전혀 다른 우리식 창작품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남겼다. 우리의 삶이 그 안에서 살아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모방이나 아류작이 아닌, 대한민국의 고유한 문화인 것이다. 선진국의 장르를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전범을 남겼다고 해도 좋다.



5. 아쉬움


< 베토벤 바이러스>는 종반에 접어들면서 삼각관계라는 질척거리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강마에와 강건우가 엉뚱하게도 여자 때문에 대립한다는 이상한 설정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대신에 클래식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과 공연의 밀도는 점점 약화됐다. 강건우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찬찬히 제시되지 못하고, 천재로 비약해버렸다. 패배자들이었던 단원들이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과정도 그리지 못했다.


이건 제작환경 때문이다. 충분히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면 다른 전개도 가능했다. 그러나 촉박한 일정과 시청률에의 강박이 결국 부실한 클래식 장면과 익숙한 삼각관계로의 일탈을 불렀다. 제작비의 압박은 과도한 극 중 광고라는 구설수도 낳았다. 이것이 <베토벤 바이러스>가 남긴 '아쉬움'이다. 작가와 제작진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현실의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것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제작환경이 개선되기 전까진, 보다 전문성에 육박하는 드라마가 나오기 힘들 거라는 문제의식이 아쉬움과 함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