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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지겨운 선덕여왕을 더 늘린다고?

 

<선덕여왕>을 최소 14회 이상 더 늘린다고 한다. 이번 주 <선덕여왕> 11회가 준 느낌은 한 마디로 ‘지겹다’였다. 그렇지 않아도 지겨운데 더 늘린다고? 이건 재난이다.


구조가 튼튼해야 늘려도 무리가 없다. 약한 구조로는 연장의 부하를 절대로 견딜 수 없다. 연장하려면 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그것은 대중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구도를 짜야 한다는 뜻이다. 이번 주 들어 <선덕여왕>이 지겨워지자 온갖 ‘옥의 티‘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구조가 약하면 어설픈 부분들에서 누수가 생기는 법이니까.


반대로 구조가 튼튼하면 옥의 티 따위가 많아도 상관없다. 어차피 한 편 짜리 영화도 아니고, 수십 편 짜리 연작이다. 제한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옥의 티는 속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감정이 이입되는 상황만 만들어지면 옥의 티는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일부 눈 밝은 이들이 계속 지적하겠지만 시청률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감정이 이입되지 못하면 옥의 티가 하나도 없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도 반드시 망한다.


수십 편 내내 완전하게 긴장을 유지하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보는 이의 감정을 이입시키기만 하면 설사 자질구레한 문제들이 있어도 흐름은 저절로 굴러간다. 그러므로 대하 영웅서사극인 <선덕여왕>에 지금 필요한 것은 자잘한 논리적 완결성이 아니라 큰 틀에서의 구조를 확고히 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세 가지다.


1. 캐릭터의 흡인력


캐릭터에게 감정이입만 이끌어낼 수 있다면 아무리 재미없는 작품이라도 인기를 끌 수 있다. 나 자신, 내 가족, 내 친구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그들이 전쟁에 나갔거나 목숨 건 모험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일상의 그저 그런 일들일 뿐인데도 그들의 이야기엔 관심이 간다. 그들에게 감정이 이입됐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정이입이 안 되면 아무리 목숨 건 모험을 하더라도 하품만 나올 뿐이다. 별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자기 파병 갔던 얘기를 떠든다고 상상해보라. 그보다 지겨운 일은 없다. 그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점심메뉴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다.


이렇게 캐릭터의 매력과 흡인력은 중요하다. 별 고심 없이도 드라마 수십 회 분량을 거저 먹을 수 있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선덕여왕>의 문제는 이 부분에서부터 흔들린다는 데 있다.


먼저 주인공 덕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앵앵거리는 응석받이 땡깡 욱사마 캐릭터다. 덕만이 전쟁터에서 앵앵거리는 걸 보고 제작진은 ‘휴머니즘’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휴머니즘이 아니다.


병사 하나, 동료 하나의 목숨이라도 살리려고 노심초사했던 건 이순신, 대조영, 담덕, 주몽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덕만과 달리 책임을 졌다. 스스로 전략을 입안하고 앞장서서 지휘를 하고, 불이익을 감당했다. 반면에 덕만은 입만 살았다. 여기서 영웅성과 땡깡이 갈린다. 땡깡 욱사마는 절대로 흡인력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없다. 덕만 캐릭터를 진화시켜야 한다.


조연에게 떡실신 당하고 있는 김유신. 용맹한 화랑으로서도, 믿고 의지할 만한 지휘자 혹은 남자로서도 빵점이다. 오죽하면 4대 주인공 중 한 명인데 조연인 알천랑에게조차 밀릴까. 김유신은 좀 더 단호하고 능동적인 캐릭터가 돼야 한다. 수동적인 캐릭터는 절대로 영웅서사극을 감당할 수 없다.


미소인형이 된 미실. 미실은 점차 남이 친 사고에 ‘댓글’ 하나 다는 관전자가 돼가고 있다. 미실과 <찬란한 유산> 김미숙이 양대 악녀로 떠올랐었는데, 김미숙은 계속 능동적으로 주인공을 핍박하는데 반해 미실은 ‘어어어’하고만 있는 것이다. 이럼 곤란하다.


2. 속도감과 집중


전개가 늘어지면 안 된다. <선덕여왕> 이번 주 전쟁씬의 경우 ‘이보다 늘어질 수 없다’였다. 드라마가 오지랖이 너무 넓다. 주인공들한테도 감정이입이 안 되는 판인데 병졸들한테까지 지나친 감정이입을 요구하고 있다. 또, 전투가 너무 길어지다보니 익히 우리가 보아오던 소규모 개싸움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연들에게 지나치게 포커스를 맞추는 기조가 변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극은 시시때때로 늘어질 것이다. 과거 영화 <무사>는 조연들을 너무 부각시키며 동시에 주인공 캐릭터에겐 매력을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의 외면을 당했다. 조연들의 소소한 감정상태, 애환보다 메인테마와 주인공에게 집중할 때다. 먼저 근본을 세우고 곁가지들은 나중에 늘려나가야 한다. 곁가지가 먼저 대두되면 혼란스럽고 늘어진다.


3. 분명한 이유가 있는 구도


지금 당장은 이게 큰 문제가 안 되지만 길게 보면 영웅적 서사극이 대박을 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초공사가 이것이다. 시청자가 주인공 일당을 응원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줘야 한다. 이게 없으면 감정이입이 일정 수위를 넘기 힘들다.


도대체 미실 일당이 권력을 잡아선 안 되고 덕만 일당이 반드시 권력을 잡아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 이유가 제시되지 않으면 그저 서로 권력을 잡으려는 개싸움판일 뿐이고 시청자가 간절히 덕만 일당을 응원할 까닭이 없게 된다.


모든 성공한 서사극의 주인공들은 시청자에게 그 이유를 제시해줬다. 충무공의 조국수호, 주몽의 한나라에 대한 자주와 고조선재건의 꿈, 대조영의 당나라로부터의 자유 등. 크게 보아 국가의 자존과 백성의 안녕이다. 이 때문에 시청자는 그들을 절박하게 응원했고 대박이 터진 것이다.


<선덕여왕>에서 미실 일당은 자기 이익과 조국 신라 모두를 위해 싸우는데 김유신, 덕만 등은 오직 자기들 집단의 생명을 위해서만 싸웠다. 주인공들이 더 찌질했다. 이러면 안 된다. 주인공의 목표는 자기들 집단의 안위보다 더 커야 한다.


주인공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를 마련해줘야 한다는 소리다. 자기들 생명 따위 말고 더 큰 것으로 말이다. 덕만의 가치가 미실의 가치보다 더 신국에 이로워야 한다. <선덕여왕>엔 아직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제시가 없다. 이러면 극이 장기적으로 탄력을 받기 힘들다.


연장할 때 하더라도 캐릭터와 구도를 분명히 잡아놓고 해야 한다. 지금 상태에서의 연장은 재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