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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아바타 천만돌파와 제임스카메론의 무서움

 

미국 영화 <아바타>가 한국에서 천만을 돌파했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다. 인구가 오천만 수준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천만 돌파라니. 한국 영화가 천만을 돌파해도 대단한 사건인데, 미국 영화라면 더욱 그렇다.


한국 영화가 외국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천만 돌파에 더 유리한 것은,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집단적 기억, 집단적 정서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라든가, 우리의 열패감이라든가, 우리 사회의 문제라든가 등등등.


그런 것 없이 단지 영화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는 천만 돌파 같은 기이한 사태가 발생하기 힘들다. 한국 시장에서 순수하게 영화의 재미만으로 올릴 수 있는 관객 수는 아마도 600~700만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는 미국 영화로서, 한국인의 기억, 한국사회의 문제와 상관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천만을 넘고 있다. 왜 그럴까? 또, 세계적으로도 어디에서나 이런 현상을 이끌어내고 있다. 왜 그럴까? 아바타에는 어떤 비밀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전형성 혹은 통속성. 둘째, 이슈메이킹. 셋째, 감동과 공감.


1. 전형성 혹은 통속성


많은 사람들이 <아바타>를 새롭고 혁신적인 그 무엇이라고 한다. 그게 흥행 폭발의 이유라는 것이다. 천만에. 전혀 그렇지 않다. 대중은 새로움 따위를 원하지 않는다. 새로움에 흥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뿐이다. 만약 <아바타>가 정말로 혁신적인 것이었다면, 500만 수준은 몰라도 1,000만은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바타>는 너무나 익숙한 멜러 액션 드라마다. 극히 전형적인 이야기라서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다. 마치 시청률 40%를 넘나드는 주말드라마가 잠깐만 봐도 그 구도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통속적인 것처럼, <아바타>도 통속적이다. 이러한 통속성이야말로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이는 <아바타> 열풍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라 할 것이다.


그래픽이 새롭다고 호들갑들을 떨지만 사실 시각적으로도 그리 새롭지 않다. 새롭다기보다 여태까지 나왔던 것을 ‘돈을 처발라’ 집대성한 것에 가깝다. 그래서 영화광들이나 평론가들이 <아바타>를 보고 실망했다는 논평을 내놓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지식 창고를 뒤져 <아바타>에 나온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미지들의 계보를 작성하기도 한다.


바로 그렇게 새롭지 않기 때문에 <아바타>는 다수의 평범한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바타>의 기묘한 점은 근본적으로 새롭지 않지만, 마치 새로운 것처럼 대중이 느끼도록 한다는 데 있다. <아바타>의 압도적인 물량이 ‘양질전화’를 일으켜, 마치 질적인 도약을 한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은 편안하게 익숙한 멜러를 즐기며 혁신을 체험한다는 만족감도 얻을 수 있게 된다.


2. 이슈메이킹


위에서 한국 영화는 한국인의 기억이나 문제를 건드려 천만을 돌파한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사회이슈화한 영화가 큰 사고를 치는 것인데, <아바타>는 그런 사회적 이슈화가 없이 천만 돌파라는 사고를 쳐서 평자들이 신기해하고 있다.


그러나 <아바타>도 이슈를 장착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한국인만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지구인의 보편적 정서를 건드린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한국인도 어차피 지구인이기 때문에 <아바타>의 이슈메이킹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아바타>의 가장 큰 이슈메이킹은, 이 영화를 인류가 이룩한 또 하나의 영상혁명으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 있다. 인류 역사 수십 년에 한 번씩 오는 혁명적 진보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극장에 가서 이 엄청난 사건의 체험자가 되어야 한다는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덕분에 나도 2D로 한 번 보고, 3D로 또 보고 말았다. 별 거 없더만... -_-;;)


<아바타>는 사회적 이슈들도 만들어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공격함으로서 미국 근본주의자들의 거부반응을 초래한 것은 물론 심지어 교황청까지 <아바타> 논쟁에 끌어들였다. 이 정도면 이슈파이팅의 전설적 성공사례라 할 만하다. 또, 수정주의 서부극 떡밥을 툭 던져 평자들을 바쁘게 했다. 또, 부시의 이라크전을 대놓고 비웃어 보수파와 진보파간의 문화전쟁이 한창인 미국사회에 불을 질렀다. 이라크전 문제는 지구인의 보편적 이슈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아바타>의 지구적 이슈화의 사례일 것이다.(중국과 한국에서 <아바타>는 철거와 강제이주의 문제를 건드리기도)


제임스 카메론이 영리한 것은 이런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하면서, 적당히 대중적으로 한다는 데 있다. 절대로 심도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는 대중이 불편하지 않는 선에서 멈추는 법을 알고 있다. 아무튼, 이런 신기술 이슈와 사회적 이슈들로 <아바타>는 반드시 확인해줘야 하는 영화로 격상되는 데 성공했다.


3. 감동과 공감


이게 중요하다. 감동적인 이야기. 공감을 주는 이야기. 이거 없이 각종 기술들을 아무리 전시해봐야 말짱 꽝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위대함은 위에 언급한 모든 것들을 감동적인 이야기로 버무려내는 능력에 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엄청난 액수의 블록버스터를 만들고, 게다가 3D를 내세울 거라면 누구나 백이면 백 정신없는 액션을 배치할 것이다. 그런데 제임스 카메론은 <킹콩>같은 중간 추격전도, 디즈니 애니메이션같은 롤러코스터식 액션도 집어넣지 않았다. 신천지에 갔는데 거대 공룡도 없고, 수중 괴수도 없다. 막판 대격전에서 한번 크게 터뜨릴 뿐이다. 영화를 보며 그 자제력이 무서웠다. 심지어 코믹 코드도 없다.


그는 긴 호흡으로 감동을 만들어나갔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감동은 철저히 대중적인, 딱 아카데미 작품상 수준의 감동이다. 그 수준을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해주면, 대중은 다른 영화를 본다. 제임스 카메론은 대중적인 수준의 감동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미국 용병들이 원주민들을 학살하며 주거지를 파괴하는 장면이라든가, 반격에 나선 원주민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죽어가는 장면, 그리고 영웅이 되어 원주민들을 이끄는 주인공의 모습 등은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또, <아바타>에는 동경과 공감이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이 다른 존재로 재탄생하는 이야기다. 그 다른 존재는 바로 ‘완벽한 인간’이다. 이상적인 신체와 용기, 우애, 게다가 익룡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에선 자유까지 느낄 수 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당당한 인간. 이야말로 인류의 원초적인 염원 아닌가.


지금 전 세계적으로 공동체가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 <아바타>에서는 이상적인 공동체가 그려진다. 격차도 없고, 착취도 없고, 군림도 없는. 모두 함께 살고 모두 함께 먹는다. 주인공이 원주민의 일원으로 인정받는 순간에 그들은 모두 팔을 얹고 서로를 연결한다. 공동체의 강렬한 유대감이 표현된 장면이었다. 더 나아가 <아바타>에선 모든 생명체가 교감을 나눈다. 이런 유대감에 대한 동경을 현재 인류가 공유하고 있는데, <아바타>가 그 지점을 콕 건드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바타>는 생태 환경과 조화된 이상적인 삶을 다룬다. 생명 하나도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 이것은 녹색의 가치가 점점 커지는 현재 도시의 폭주 시대에 대중의 공감을 얻는 장치가 된다.


종합하면, ‘돈을 처발라’ 막대한 물량공세로 현존하는 모든 영상기술을 집대성하여 보는 이를 압도하며, 3D 이슈와 사회적 이슈들로 반드시 봐줘야 하는 영화가 되고, 이 모든 것을 통속적 멜러와 감동, 공감의 이야기로 버무려 다수 대중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대작을 만든 것이 <아바타>의 폭발적인 흥행의 이유라고 하겠다.

<타이타닉>에 이어 또다시 그 흥행의 지점을 냉정하게 잡아낸 제임스 카메론이 정말 무섭다. 절이라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