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희의 <마이 프린세스>가 순항중이다. 드라마의 시청률만 성공적인 게 아니라, 김태희도 모처럼 찬사도 받고 있다. 이전 작품인 <아이리스> 때는 작품은 성공했지만 김태희 자신은 그리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었다.

이번엔 배역이 워낙 좋다. 김태희에게 어울리는 귀엽고 순수하고 발랄한 아가씨 역할이다. 이 배역을 통해 김태희의 매력이 300% 발산되고 있다. 보고 있으면 눈이 워낙 즐거워서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세상사다. 와중에 같은 시간대 경쟁작들인 <싸인>과 <프레지던트>도 모두 무겁다. 시청자에게는 TV를 볼 때만큼은 무겁고 우울한 세상사를 다 잊고 가볍게 즐기고 싶은 욕구가 있다. <마이 프린세스>는 그런 마음을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다.

김태희가 진작 이런 역할을 맡았었다면 훨씬 화려한 인기를 누렸을 것이다.(물론 이미 충분히 화려하긴 하지만) 그동안 김태희는 의외로 어둡거나 무거운 역할들을 종종 맡았었다. 지금 나이에 이르러서 귀여운 역할은 때늦은 감이 있다. 그래도 어쨌든 김태희를 위한 맞춤옷같은 느낌의 배역이다.

그래서 모처럼 찬사도 받고, 작품도 순항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 깊은 울림이 없다는 것이 유난히 도드라진다. 바로 직전에 <시크릿 가든>이 방영됐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어 방영되고, '화사 화려 유쾌'라는 기본적 특성 때문에 두 작품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시크릿 가든>은 단순한 인기가 아니라 신드롬을 초래하며 숱한 폐인들을 양산했다. 그에 비하면 <마이 프린세스>는 그저 인기 있는 드라마의 수준이다. <시크릿 가든>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면 <마이 프린세스>는 가벼운 간식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지원과 김태희의 특징이 이런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아프냐? 난 안 아프다' -

요즘 <마이 프린세스>에선 김태희가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다. 매체들은 그때마다 '김태희 폭풍오열, 시청자 울렸다', '김태희 눈물, 안방도 함께 울었다'는 식의 기사들을 내놓기 바쁘다. 하지만 그런 기사에 대한 네티즌 반응은 싸늘하다. 함께 울었다는 사람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김태희가 극중에서 아무리 아파도 시청자는 아프지 않은 것이다. 김태희가 어떤 표정을 짓건 어떤 정서를 표현하건, 그녀는 예쁜 배우 김태희일 뿐이고 시청자에겐 화사한 그림일 뿐이다.

하지원이 툭하면 폐인들을 만드는 것은 저 전설적인 <다모>의 대사, '아프냐? 나도 아프다'에 모든 시청자들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무리 화사하고 비현실적인 작품에 나와도 그 아픈 눈빛으로 시청자의 심장 깊은 곳을 울린다. 그래서 시청자들을 함께 아프게 하고 신드롬을 불러일으킨다.

반면에 <마이 프린세스>에서 김태희의 정서표현은 시청자의 눈에만 닿을 뿐 심장까지 울리지는 못한다. 숱하게 나오는 '폭풍오열' 장면들도 그렇다. 요즘 김태희는 울었다 하면 엉엉 울고 있는데, 이런 건 '나 지금 화끈하게 울고 있어요'라는 정보전달은 해주지만 그렇게 울도록 하는 아픈 정서에는 전혀 공감을 느끼게 하지 못한다.

찬사를 받는 배우들은 보통 정보가 아닌 정서를 전달한다. 예컨대 <제빵왕 김탁구>에서 김탁구와 구일중 회장(전광렬)이 재회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때 난 두 주인공이 울 거란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기 싫었고, 재방송을 억지로 보는 듯한 느낌으로 봤다. 하지만 전광렬은 정보를 뛰어넘는 정서를 전달했다.

그의 울음에서 오랜 세월 아들을 만나지 못하다가 겨우 찾은 아버지의 회한, 감격 등의 정서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가 우는 모습을 보며 시청자인 나도 함께 울컥했다. 이렇게 시청자를 함께 울리는 것이 진정한 '폭풍오열'이다.

<마이 프린세스>에서 김태희는 기쁨, 슬픔 같은 단순한 감정의 정보들을 그때그때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이런 연기는 아역들의 방식이다. 아역은 웃을 때는 천진난만하게 웃다가, 울 때가 되면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처럼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정서를 느끼게 하진 못한다.

하지원의 깊고 아픈 눈빛 같은 것 말이다. 엉엉 울지 않아도, 눈물만 한 줄기 흘러내려도 보는 이를 함께 울게 하는 그런 눈빛. 장혁은 <추노>에서 계란을 먹으며 오열하는 장면으로 연기의 내공을 보여줬었다.

그에 비하면 <마이 프린세스>는 대단히 단순하다. 그 중심인물인 김태희의 '엉엉 울음'이 바로 그런 단순함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재밌기는 한데 심장을 울리지는 않고, 그래서 신드롬이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김태희의 이런 연기가 근본적인 한계인지 아니면 만화 같은 <마이 프린세스>에 최적화된 선택인지는 다른 작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어쨌든 김태희는 어떤 작품을 해도 '김태희의 000'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드는 행복한 배우다. 하지원은 상대역을 띄워주는데 김태희는 본인이 도드라진다. 이런 인기와 존재감이 있다면, 그에 걸맞는 연기도 기대하게 된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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