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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싸이 신드롬의 불편한 진실

 

<강남스타일>은 처음에 한국에서 그렇게 뜨거운 호응을 받지는 못했었다. 뮤직비디오도 ‘싸이답게 웃기는 비디오’라는 정도의 반응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미국사람들이 여기에 열광했고, 그것이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국은 서양의 반응에 민감한 나라다. 서양 사람들이 한국 가수에게 열광하는 모습을 보자 한국에서도 싸이 신드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싸이 가수 인생에 기적 같은 2차 전성기가 전개됐다.

 

이것을 두고 사대주의 아니냐, 너무 호들갑 떠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요즘 나온다.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서양의 반응에 과도하게 민감한 건 맞지만, 우리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대한한국은 잿더미와 ‘기브 미 초콜릿’에서부터 시작한 나라다. 그 전엔 식민지였고, 그 전엔 구한말의 암울한 시절을 보냈다. 그후 가까스로 몇몇 물건을 잘 만드는 나라가 됐고, 최근엔 동아시아에서 인기 있는 아이돌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서양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가요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사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양의 벽은 너무 높았다. 아이돌이 서양진출을 하기도 했지만 일부 마니아층에서의 인기였다. 팝문화의 본바닥인 서양에서 한국 가요가 성공할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았고, 그것이 우리의 한계처럼 여겨졌다.

 

그러던 차에 <강남스타일>이 터진 것이다. 이건 경이였다. ‘우리 가요를 전 세계인이 따라하다니! 가요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다니!’ 미군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고, 뒤늦게 개발을 시작했던 우리가 이 만큼이나 자란 것이다. 대중문화분야에서 건국 이래 최대 사건이다.

 

서양의 ‘고기 먹고 큰’ 사람들이나 하는 줄 알았던 월드컵 4강을 우리가 했을 때, 서울시청 앞에 국민들이 몰려나왔다. 그건 자축이었다. 잿더미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성큼 온 나라. 식민지 출신 후발주자의 노래가 세계적 열풍을 일으킨 기적적 사태가 펼쳐지자, 다시 국민들은 서울시청 앞에 모여 자축했다. 이런 기쁨과 자신감의 표현을 굳이 사대주의라며 조롱할 필요는 없다.

 

- 싸이 신드롬의 불편한 진실 -

 

싸이 신드롬이 국가적 사건이며 자축할 일인 것도 맞고, 우리 대중문화의 성장과 국가의 성숙을 보여주는 사건인 것도 맞지만, 거기에 취할 일만은 또 아니다. 여기엔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이 있다.

 

싸이는 역대 한류 남성 스타 그 누구보다도 미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큰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스꽝스런 동양 남자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게 한계다. ‘멋진’ 남자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비주류 인종이 미국에서 성공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주인공이 터프하고 멋진 역할을 맡을 때, 흑인은 우스꽝스러운 ‘떠벌이’ 캐릭터로 자기 자리를 찾았다. 똑같이 헐리우드에 갔지만, 멋있게 보이려는 이연결, 주윤발보다 희화화된 캐릭터인 성룡이 훨씬 성공했다. 싸이도 이렇게 희화화된 감초 캐릭터로 미국 연예계에 ‘차출’ 된 것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싸이 신드롬이 동양에 대한 편견을 키운다는 분석이 영국에서 나왔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 우리가 아직 ‘멋진’ 세계적 스타를 만들어내지 못한 건 한계이지만, 한국에서 팝스타가 나온 것 자체가 일단 반가운 일이다. ‘멋진’ 스타를 키워내는 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또 다른 한계는, 이것이 음악성 자체에 대한 인정은 아니라는 점이다. 어쨌든 싸이는 뮤직비디오가 웃기고, 캐릭터가 웃기고, 말춤이 신나서 떴다. 음악도 클럽댄스용으로 잘 만들기는 했지만, 음악 그 자체만으로 뜬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즉, 싸이의 성공을 한국 대중음악의 성취로 인정해서는 곤란하다는 이야기다.

 

싸이 신드롬은 우연적 사태이고 기적이다. 싸이의 성취와 상관없이, 우리 대중음악계에는 여전히 아이돌이 흘러넘친다. 싸이가 서양에서 인기를 끈다고 해서 변한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로또가 하나 터졌을 뿐이다. 가요계에서는 새로운 바람을 찾기가 힘들고, 영화계에서도 얼마 전에 김기덕 감독이 새 인재가 안 나온다는 자탄을 했고, 드라마는 막장 세상이다. 싸이의 성취도 사실 아이돌과 엄청나게 다른 새 지평을 열었다기보다, 조금 다른 종류의 댄스음악을 보여준 것에 불과하다.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싸이 신드롬이 우리 대중문화계의 성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도취해도 좋을 성장을 이룬 것처럼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 편협함을 버려라 -

 

이번 싸이 신드롬을 통해 우리의 편협함이 다시 드러났다. 한 번은 내부를 향해서, 또 한 번은 외부를 향해서였다. 싸이 신드롬이 터지자마자 박진영이 조롱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다른 아이돌들도 싸잡아 조롱의 대상이 됐다. 싸이가 성공한 걸 축하해주고 기뻐하면 그만이지, 왜 싸이를 칭찬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조롱해야 한단 말인가? 이건 단 하나의 정답만 숭상하고, 성공한 사람이 곧 정답인 사람이라는 편협한 생각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싸이가 유튜브를 통해 본의 아니게 미국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강제진출’당했지만, 그 길만이 정답은 아니다. 미국에 직접 가서 바닥부터 도전한 사람들의 땀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한다. 모든 도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또, 아이돌이 싸이보다 못해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도 있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한국 아이돌의 스타일은 애초에 미국과 잘 맞지 않는다. 미국엔 우리처럼 ‘각기춤’을 추는 아이돌이 없을뿐더러, 우리 아이돌의 음악도 완전히 미국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에 싸이는 미국대중문화와 대단히 가까운 스타일을 보여준다. 미국사람들이 한국 아이돌보다 싸이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다. 이건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우수하고, 안 그런다고 해서 열등한 걸로 보는 건 편협한 관점이다.

 

외부를 향한 편협함은 일본을 향해 나타났다. 일본이 싸이를 안 좋아한다는 점을 우리 매체와 네티즌이 조롱한 것이다. 싸이를 좋아하건 말건 일본 사람들 마음이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일도 아니거니와, 일본을 조롱한 근거가 서양에서의 싸이 신드롬이었는데 서양 사람이 싸이를 좋아하건 말건 일본이 왜 그걸 신경써야 한단 말인가?

 

이렇게 뭔가 하나가 잘 되면 우격다짐식으로 그것만 옳다고 하고, 거기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조롱하는 태도로는 제2, 제3의 싸이를 만들 수 없다. 싸이는 90년대 ‘날라리’ 출신이다. 당시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열정과 개성을 분출했던 젊은이들이 오늘날 한류 문화를 만들었다. 앞으로 한국문화를 발전시키려면 그렇게 각자의 개성을 가진 괴짜들이 기를 펼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그러려면 툭하면 정답 아닌 사람들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외국에까지 특정한 취향을 강요하는 우리의 편협함을 버려야 한다.

 

(세계일보 기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