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드라마엔 전지전능한 악역이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왔다 장보리’의 이유리(연민정)를 들 수 있겠다. 이 작품에서 연민정은 모든 사람들의 비밀을 캐내는 셜록 홈즈 이상의 괴력을 선보였다. MBC는 이 초인적 악역에게 연기대상으로 보답했다. 최근 인기를 끄는 ‘내 딸, 금사월’에도 유사한 느낌의 악역이 등장한다.
지상파 드라마는 또 악행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악인들을 등장시킨다. 최근 수목드라마로 인기를 끄는 ‘리멤버 - 아들의 전쟁’의 남궁민 같은 절대 악인 말이다. 그는 타인의 목숨을 빼앗거나 삶을 망가뜨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상파 드라마가 이런 캐릭터들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키는 건 그래야 작품의 자극성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악인과 그로 인해 고난의 삶을 사는 주인공, 그리고 마지막 복수라는 판에 박은 듯한 설정이 매주 반복되는 것이 지상파 드라마다.
그런데 tvN의 ‘응답하라 1988’엔 그런 비현실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서울 도봉구 쌍문동 골목에 사는 서민들의 일상이 펼쳐질 뿐이다. 지상파 방송사들보다 더 자극적인 설정에 매달릴 거라 우려됐던 케이블TV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상파 드라마의 또다른 공식은 신데렐라의 등장이다. 준재벌 이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금수저와의 로맨스가 없으면 드라마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신념이라도 있는 듯하다. ‘응답하라 1988’은 이러한 공식도 여지없이 깨버렸다.
지상파 드라마는 또, 스타 캐스팅에 매달린다. 스타를 간판으로 세워야만 편성을 내주기 때문에, 제작사들은 지상파에 작품을 걸기 위해 스타에 돈을 퍼붓는다. 그 결과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스타들 출연료로 소진되고, 조연들과 스탭들은 상대적 박탈감이나 출연료 미지급 등에 고통 받는다. 스타의 과도한 출연료로 인해 작품 완성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스타 출연료 지출을 메우기 위한 PPL 광고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지상파 방송사들은 스타에 대한 집착을 멈추지 않는다.
‘응답하라 1988’은 스타를 캐스팅한 것이 아니라 스타를 만들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처음부터 신인을 캐스팅해 스타로 키워왔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스타를 키우면 지상파 방송사가 캐스팅하는 구도가 반복된다.
‘응답하라’ 시리즈만이 아니다. ‘미생’이 발굴한 변요한도 요즘 지상파 드라마에서 활약중이다. ‘미생’에도 신데렐라 로맨스 따위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미생’ 시나리오는 지상파 방송사에선 제작될 수 없는 작품이란 평을 들었다. ‘미생’의 충격 이후 지상파 방송사가 변화를 모색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후의 작품들을 보면 모색은 모색으로 끝난 것 같다.
상황이 이러니 지상파 드라마에 대한 대중의 신망이 점점 더 떨어져간다. 반면에 ‘응답하라’ 시리즈 같은 걸 만들어내는 tvN의 위상이 올라간다. 김혜수, 이제훈의 컴백작 ‘시그널’이 이제 곧 tvN에서 방영된다. 고현정과 노희경 작가의 신작도 tvN에서 나올 예정이다. ‘응답하라 1988’이나 ‘미생’과 같은 새로운 느낌의 작품들을 뽑아주니 배우들도 tvN을 선택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상파 방송사가 누려왔던 절대적 지위가 무너져가는 징후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지금처럼 악인, 신데렐라 코드, 스타캐스팅 등 도식적인 성공공식 안에서 안주한다면, 그나마 아직까지 보존된 지상파 위상마저 붕괴할 것이다. 옛날식 행태를 화석처럼 유지해간 대종상은 배우들과 영화팬 모두의 외면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사에게도 남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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