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1211, 대선을 1주일 앞둔 민감한 시점이었다. 그때 부산의 초원복국집이란 곳에서 정부기관장들이 모여,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인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모의를 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공분을 살 만한 일인데, 이들이 그곳에서 나눴다는 대화의 내용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지역감정을 부추겨야 한다느니, 지역민들이 김영삼 아닌 후보들에게 정신 팔리면 영도다리에 빠져죽어야 한다느니 하는 식으로 너무나 저열한 수준의 대화였다.

 

이 대화가 세상에 알려진 건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 관계자들의 도청 폭로에 의해서였다. 관권선거를 고발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의 기관장들이 지역감정을 모의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까지 만방에 알렸으니 일종의 공익제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폭로는 초원복국집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반드시 언급될 정도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이 정도 사건이 터졌으면 당연히 유권자 민심이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자유당을 규탄하는 쪽으로 흘렀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 사건에 자극받은 부산경남 지역민들이 우리가 남이가라며 결집했고 김영삼 후보가 승리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남이가표퓰리즘의 무서운 힘이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주술에 걸리면 윤리, 도덕, 대의명분, 이성, 수치심 등이 모두 사라진다. 그저 똘똘 뭉쳐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가 이겨야 한다는 집단심리만 남는다. ‘우리가 남이가는 또, 우리 아닌 타자들의 결집도 초래한다. 한쪽에서 뭉치면 반대쪽도 뭉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묻지마 집단들의 결사대립이 나타나고 나라는 쪼개진다. 분열의 정치다.

 

 

이번에 미국 대선의 트럼프가 그랬다. 트럼프는 백인들, 특히 그중에서도 남성들을 향해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다. 다양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아우르는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백인들, 백인남성들의 구미에 맞는 말만 했다.

 

이민자들을 조롱하고, 유색인들을 비하하고, 여성을 철저히 성적으로 대상화한 것이다. 이것이 이민자들, 유색인들, 페미니즘으로 대표되는 다양성의 윤리적 가치에 속을 부글부글 끓이던 미국 백인들의 속마음을 후련하게 했다. 그리하여 백인(남성)들 사이에 우리가 남이가라며 묻지마 트럼프로 대동단결이라는 집단심리가 나타난 것이다.

 

어떤 집단을 향해 이런 전략을 펼 수 있는 건 그 집단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만약 백인이 다수가 아니었다면 트럼프는 절대로 유색인을 조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히스패닉이 다수였다면 그들의 입장에서 백인 고용주를 조롱했을 것이다. 어찌됐건 다수에게 우리가 남이가 집단심리만 불러일으키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식의 우리가 남이가전략은 필연적으로 나라를 쪼갠다는 점이다. 두고두고 후유증이 남는다. 기업은 특정 타겟만을 우리 소비자로 점찍어 마케팅을 해도 되지만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전 국민을 아울러야 한다. 트럼프는 사업가로서 오직 표의 수만을 계산해 타겟을 분명히 하는 일종의 마케팅 선거운동을 했을지 모르나, 그 대가로 미국엔 깊은 분열의 상처가 남았다.

 

트럼프는 또, 미국에 뿌리 깊은 인민주의적 분노도 활용했다. 지배 엘리트와 동부금융자본 등을 향한 서민의 분노다. 2008년 금융위기 등을 거치면서 그 분노는 더욱 커졌는데, 트럼프는 자신이 정치신인이란 점을 내세워 이 분노를 가져갔다. 힐러리는 엘리트 그둘, 트럼프는 서민과 함께 우리가 된 것이다. 트럼프는 서민들의 경제적 열망을 자극하기도 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이게 남의 일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남이가현상은 한국에도 지역주의 망국병으로 진작부터 있어왔고, 양극화와 불안으로 인해 기득권층이나 기존 정치 엘리트들을 향한 분노도 커져간다. 이럴 때 트럼프처럼 후안무치한 포퓰리즘의 달인이 나타나 대중을 선동하고 국가를 분열시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과거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를 따라가려고 노렸했었지만 이젠 미국처럼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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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