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은’이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이례적인 흥행세를 보이고 있다. 개봉 2주차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1위, 예매율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후 14년 만에 일본 애니메이션이 한국 극장가에서 흥행 1위를 기록했다. 100만 돌파에 이른 시간도 개봉 5일째로 ‘쿵푸팬더2’, ‘쿵푸팬더3’, ‘겨울왕국’, ‘쿵푸팬더’에 이어 역대 5위를 기록했다. 역대 일본영화 국내시장 최대 흥행작인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경우 개봉 7일째에 백만을 넘어섰었다.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치명적인 ‘12세 이상 관람가’ 등급임에도 거둔 성과여서 더 놀랍다.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관람 인증이 폭발적으로 올라오고, N차 관람 광풍이 불어 17차 관람 인증까지 등장했다. 원작 소설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미 일본에서 거국적 흥행몰이를 한 작품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신화라고 할 수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지브리 스튜디오의 흥행 기록를 차례차례 깼다. 이른바 ‘지브리 도장깨기’로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넘어서 역대 일본 흥행 4위, 2016년 일본 흥행 1위를 기록했다. 누적 1700만 돌파다.
일본에서의 신드롬을 넘어서 중국에선 개봉 첫 주 흥행 1위를 기록하며 10일 만에 17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역대 일본영화 중국시장 흥행 1위다. ‘너의 이름은’의 배경이 되는 장소에 찾아가는 관광 열풍도 생겼다. 그 외 아시아 6개국 흥행 1위, LA비평가 협회상 애니메이션 부문 수상,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경쟁작 선정 등의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한국에서도 신드롬이 터진 것이다.
개봉하자마자 관람 열기가 터진 것은 본고장 일본을 비롯해 해외에서 전해진 소식에 기대감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을 만든 신카이 마코도 감독은 차세대 미야자키 하야오로 기대를 받았었다. ‘초속 5센티미터’ 등의 작품으로 국내에 이미 팬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이 이번에 회심의 인생작을 내놨고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하자 국내에서도 개봉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난 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을 통해 마니아들 사이에서 입소문도 번졌었다.
국내 저패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존재도 이번 신드롬을 만든 힘이다. 과거 해적판 비디오 시절에 저패니메이션을 알음알음 돌려봤었지만, 그후 극장 흥행이라는 양지에선 그다지 존재감을 보이지 못했던 저패니메이션 마니아들이 ‘너의 이름은’을 계기로 일제히 행동에 나서면서 그 세가 만만치 않음을 과시했다.
저패이메이션 오덕후 수준을 넘어서 지나치게 몰두하는 ‘혼모노’의 존재도 이번 신드롬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일본에서 오타쿠는 부정적인 의미였는데, 그것이 한국에서 변용된 오덕후는 최근 들어 비교적 긍정적으로 쓰였다. 혼모노는 오덕후에서 한 걸음 더 나가 원래의 오타쿠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극장에서 영화에 몰두해 감탄사를 연발하는 등 민폐를 끼친다며, ‘혼모노 피하는 법’ 등이 회자되고 있다. ‘너의 이름은’에 열광하는 너의 이름은 ‘혼모노’, 이런 우스개소리도 나왔다.
혼모노의 존재가 ‘너의 이름은’을 통해 드러난 것은, 이 작품이 일반인에게까지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그 전엔 자기들끼리 교류했기 때문에 남들이 잘 몰랐지만, ‘너의 이름은’ 흥행몰이를 통해 혼모노와 일반인이 뒤섞이자 그들의 이채로운 행태를 일반인들이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너의 이름은’이 일반인에게까지 인기를 끈 것은 기본적으로 작품 자체에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원래 배경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을 선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정적인 분위기로 대규모 흥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너의 이름은’에선 남녀 주인공의 유쾌한 관계묘사와 블록버스터 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펙터클, 그리고 판타지와 해피엔딩을 선보였다. 대중적인 코드인 것이다. 여인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즉 판타지 히어로물의 성격도 있다. 거기에 적당히 복잡한 스토리로 지성을 자극하고, 아련한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로 감성을 자극했다.
중국에선 한한령의 덕을 봤다는 현지 분석이 나온다. 한국 영화가 사라져 빈 공간이 생겼기 때문에 일본 영화로선 이례적인 대규모 개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경제성장의 수혜를 받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저패니메이션을 많이 접했을 것이고, 그 에너지가 이번에 일시에 극장가에서 터진 측면도 있다.
미국 평론가들이 반응하는 것엔 작품 자체의 힘에 더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일본적인 요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대로 신사를 모시고 사는 집안이 배경이고, 일본의 인연설이 등장하는 등 서양인이 보기에 신비롭고 흥미로울 법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이한 건 일본에서의 반응이다. 이 영화가 충분히 볼 만한 작품이긴 하지만 거국적 흥행몰이를 할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런데 일본에선 왜 그랬을까? 바로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열쇠다. 이 작품은 두 남녀의 기이한 로맨스를 다루는 듯하다 갑자기 재앙을 이야기한다. 그 재앙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소년소녀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동일본대지진의 상처와 그로 인한 불안을 위로해준 것이다.
세파에 찌든 정치인과 기업가들은 주인공이 아무리 소리쳐도 위기를 막을 생각도 못한다. 오직 일본의 전통을 지켜온 신사 집안에서 발현된 ‘우주의 기운’과 그것을 믿은 소년소녀들의 순수한 마음만이 재앙을 막을 힘이다. 토속적인 신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일본인의 믿음을 환기시키면서, 전통과 시골의 순수함이 불안을 어루만져준다.
이 작품에 재앙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최근 있었던 재앙을 떠올리게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꼭 그렇진 않다. 우리는 이런 발랄하고 환상적인 멜로 판타지를 보며 재앙을 떠올리지 않는다. 2016년에 우리에겐 ‘부산행’과 ‘판도라’가 있었다. 메르스 사태나 지진 등을 떠올리게 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직설적이고 암울하다. 반면에 ‘너의 이름은’은 판타지 로맨스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일본인들에게 재앙은 현실화된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위협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최악의 상상을 하며 대비를 촉구할 수 있지만, 일본인은 재앙의 현실을 마주하기가 버겁다. 너무나 참혹하고, 딱히 해결방안도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불편한 진실’이다. 하지만 아주 잊어버릴 수도 없다. 마음 깊은 곳에 트라우마로 박혀있지만 드러내놓고 까발리긴 부담스러운 이야기. 그래서 청춘 멜로 판타지로 우회한 설정에 일본인들이 열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맥락은 우리 입장에선 공감하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련한 첫사랑과 아름다운 그림, 그리고 마을을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아이들의 열정은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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