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한반도 동남부를 강타한 강진으로 원자력 발전소에 문제가 생긴다는 설정이다. 영화는 매우 전형적이다. 민초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에서 상황이 터지고, 지도자들의 무능과 비양심으로 일이 더 커지며, 대규모 재난의 스펙터클이 펼쳐지고, 이내 가족코드와 눈물 쥐어짜기가 시전된다. 그리고 희생하는 것은 책임을 진 지휘자가 아닌 평범한 민초라는 전형적인 재난영화의 설정을 답습했다.
하지만 알고도 당한다. 뻔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공포와 눈물을 막을 수 없다. 뻔한 설정이 뻔한 설정인 이유는, 그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최적화된 코드여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적화된, 효과적인 코드이기 때문에 뻔한 설정을 재대로만 구현하면 결국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데 이번 ‘판도라’의 경우도 그렇다. 비록 후반부 눈물 부분이 늘어져 상영시간이 과하다는 느낌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기본 이상의 몰입감을 만들어낸 작품이다.
영화의 완성도와 별개로, 재난 부분에서 엄청난 공포가 밀려온다. 한국인의 마음속에 있는 트라우마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지진으로 인해 원전에 혹여 사고라도 나면, 이 좁은 땅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란 공포가 최근 들어 커졌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뉴스들이 마음속에 공포의 씨를 뿌렸던 것이다. 그것이 최근 한반도 지진으로 더욱 커졌고,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 등에서 나타난 우리 정부의 비밀주의와 무능으로 트라우마가 되었다.
‘판도라’는 바로 그 트라우마의 상자를 열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일반적인 영화관람에서 느껴지는 수준 이상으로 숨이 막힐 것 같은 공포심이 느껴지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특히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 정부가 국민의 목숨을 우습게 여긴다는 인식이 생겼고, 결국 국가로부터 우리가 버림받았다는 트라우마가 자라났는데 ‘판도라’는 그 부분을 건드렸다.
이 영화에서 대통령은 무능하고 총리가 전횡한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서 총리가 대통령 위에 서는 게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설정이 몰입을 방해한다. 원래는 총리가 아닌 청와대 비서실장이란 설정이었는데 중간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바뀌었다고 한다. ‘왕실장’ 김기춘 전 비서실장을 모델로 실세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제작 중 외압으로 설정이 바뀐 것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 원래 “도대체 이 나라는 누가 이끌고 있는 겁니까?”라는 대사도 있었는데 삭제됐다고 한다. “이게 나랍니까?”라는 대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대사들이 다 살아있었더라면 촛불정국과 맞물려 더욱 폭발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누군가를 실세로 상정한 것을 보면 감독도 박근혜 대통령에게 뭔가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이 국정을 실제로 장악해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말이다. 그래서 합리적 추론 끝에 청와대 비서실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행태는 박정우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으로도 족탈불급이었다. 실세는 어느 아주머니였고, 그 옆에 전직 유흥업소 직원, 뮤직비디오 감독 등이 포진해 있었다. 그 아주머니는 오방낭을 선호하는 분이었다. 박 대통령은 비서실장도 총리도 아닌, 이런 사람들과 국정을 함께 했다.
지도자의 무능은 재난영화의 기본공식이고, 거기에 더해 최근 사태들에서 나타난 우리 정부의 모습까지 투영됐기 때문에 감독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능력한 지도자를 그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대통령을 따라갈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 아무리 무능력한 대통령이지만, 국민이 죽어가는 사고가 터졌는데 강남에 있는 미용사와 메이크업 전문가를 부르진 않았다.
박 대통령은 지금 세월호 사건 당시 근무시간임에도 다른 일을 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사고에 무관심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다. 영화 속의 지도자는 국민의 생명에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그저 무능하기만 했을 뿐이다.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는, 얼굴 보기 힘든 지도자도 영화엔 나오지 않는다. 감독의 상상력이 도저히 박 대통령에게 미칠 수 없었다. 그 결과 지도자의 무능에 대한 묘사가 현실보다 훨씬 맥 빠진 것이 되고 말았다. 이 점이 옥에 티다.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도 원래 ‘내부자들2’를 기획하려 했으나,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압도적인 황당함에 기가 질려 포기했다고 한다. 정극의 범주 안에서 그 어떤 상상력을 발휘해도 현실을 넘어서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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