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앙대학교 성평등위원회가 한 세미나에서 드라마 속 데이트 폭력 장면을 발표했다. 첫 번째로 꼽힌 것은 ‘함부로 애틋하게’에서 김우빈이 수지를 강제로 들쳐 메고, 침대로 쓰러뜨리고, 소리 지르고, 차에 태운 채 난폭 운전을 하고, 권력 관계를 이용해 이성으로 접근하는 장면들이었다.
그 다음으론 ‘우리 갑순이’에서 송재림이 김소은을 벽에 밀어붙이고 강제로 키스하는 장면, 그리고 ‘운빨 로맨스’에서 이수혁이 황정음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여는 장면, ‘또 오해영’에서 에릭이 서현진의 손목을 낚아채 걸어나가는 장면, 서현진이 탄 차의 유리창을 깨는 장면 등이 꼽혔다.
이런 장면 말고도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거칠게 밀어붙이는 설정은 대단히 많다. 여자의 손을 낚아채거나 벽으로 밀어붙여 키스하기 혹은 얼굴을 갑자기 상대 얼굴 바로 앞까지 가져다 대 여주인공 놀라게 하기 등의 설정은 거의 드라마 관습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함부로 애틋하게’에선 김우빈이 수지의 사전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서로 사귀는 사이라고 공표해 수지를 곤란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남자주인공이 불쑥 여주인공과의 관계를 공개하는 설정도 흔하다.
현실에선 용납될 수 없는 행위들이 멜로드라마 속에서 로맨틱한 행동으로 포장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대담한 행동으로 남자가 여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을 ‘심쿵’하게 한다고 하는데, 현실에서 이렇게 하면 공포를 초래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설정이 여성시청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설정들은 멜로드라마에 주로 나오는데, 멜로드라마의 주 시청층은 여성들이기 때문에 멜로드라마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설정을 주로 배치하게 되어있다. 결국 여성들의 응원 속에 여성에 대해 폭력적인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드라마 속에선 대담한 행동을 하는 터프가이들이 사실은 여주인공만을 사랑하는 꽃미남 순정남이기 때문에, 여성시청자들이 그런 행동을 로맨틱한 판타지로 받아들인다. 많은 드라마에서 돈이 많고 직위가 높은 남자주인공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부하직원 혹은 외주업체 직원인 여주인공을 오라가라하며 이성으로 접근하는데, 현실에서 이러면 성희롱이거나 스토킹이지만 드라마 속에선 현빈 같은 사람이 그러기 때문에 여성들이 로맨틱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로맨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왜곡되어 남성이 어느 정도는 여성을 강압적으로 리드해도 된다고 여기게 되면, 현실의 여성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멜로드라마 설정 때문에 여성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다.
로맨스에 대한 폭력적인 묘사는 남성우월주의 전통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과거 <제빵왕 김탁구>에서 회장이 가사도우미를 성폭행했는데, 그 가사도우미는 그로 인해 김탁구를 낳고 평생동안 회장을 사랑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남성이 여성에게 강압적으로 행위를 하면 여성이 처음엔 반항하지만 결국 남성을 받아들인다는 판타지가 남성우월주의 문화의 유산이다.
태국에도 우리로 치면 막장드라마에 해당하는 드라마들이 있는데, 거기에선 성폭행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성폭행하고 결국 둘이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다. 인도 영화에도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희롱하다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 종종 등장한다. 남성 입장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했을 때 나타나는 설정들이다.
이러한 설정들도 로맨스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남성에겐 잘못된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게 하고, 여성에겐 그 잘못된 방식을 당연한 사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데이트 폭력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기 때문에, 데이트 폭력을 부추길 수 있는 드라마 속 표현 관습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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