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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김민희 욕하기, 도덕일까 쾌락일까

김민희가 한국 여배우로는 최초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이에 대해 누리꾼의 저주가 이어지고 있다. 강수연, 전도연에 이은 낭보를 전해줬지만 대중이 그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물론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의 불륜 때문이다. 

이렇게 김민희를 단죄하는 한국 대중이 그녀의 수상에 일조했을 가능성이 있다. 서구 영화제는 비서양 지역의 억압적인 체제, 인습 등과 관련된 내용일 때 높게 평가해주는 경향이 있다. 서양 기자들이 김민희의 불륜 스캔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 지에 관심이 크다고 한다. 불륜 여배우를 매장시키는 보수성이 그들에겐 이국적으로 비쳤을 것이고, 그것이 김민희와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대해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수 있다. 

어쨌든, 이병헌 사건에 이어 김민희-홍상수 사건을 통해 예술적 능력을 도덕성에 종속시키고, 사생활을 매우 엄격히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문화가 분명히 드러나는 중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연예인에게만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남자들의 악플도 매우 많은데 보통 남자가 주변에 바람피는 지인이 있다고 해서, 연예인에게 하듯이 엄정하게 단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남자들의 세계에선 어린 애인의 존재를 과시하는 경우도 있으며, 그것을 옆에서 부러워하기도 한다. ‘능력도 좋아라는 표현이 이럴 때 나온다. 접대 명목으로 유흥업소에 몰려가기도 한다.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유부녀와 원나잇을 했다는 사람도 있다. 친구가 그런 행각을 벌인다고 절교하지 않는다. 

정말 사생활의 도덕성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면 일탈을 일삼는 지인에게도 화를 내야 한다. 그러지 않는 건, 결국 도덕성은 핑계일 뿐 연예인을 욕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 아닌가 

이중잣대가 이상하다는 얘기다. 롯데 사태에 신격호 회장의 셋째 부인이니 별당마님이니 하는 해괴한 표현이 수시로 등장하는 데도 사람들은 김민희, 홍상수에게 하듯이 화를 내지는 않았다. 혼외자가 드러난 채동욱 전 검찰총장에 대해선 동정론까지 나왔다 

이중잣대는 우리 대중예술인에 대한 역차별로도 나타난다.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불륜 및 혼외자가 드러났어도, 그것이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한국내 평판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벤 애플렉과 유모와의 불륜설이 터졌어도 그가 배트맨 역할을 하는 것에 우리 누리꾼이 특별이 화를 내지 않았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임스 카메론은 모두 젊은 여배우와 만나 부인을 버렸지만 한국에서 크게 사랑받았다. 이외에도 헐리우드 불륜사례가 많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에서 공격당한 적이 없다. 여성편력으로 악명 높은 성룡도 마찬가지다. 

피카소는 45세에 10대 소녀와 불륜에 빠지고, 나중엔 그 상간녀를 모델로 그림까지 그렸지만 한국사회에서 금기시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그림을 과거 미술교과서에 싣기까지 했고, 피카소 전시라도 열리면 부모들이 자녀에게 관람을 권장할 지경이다. 이 부도덕한 작가를 말이다! 로댕, 스트라빈스키, 바그너 등의 불륜도 유명한데, 그것 때문에 악플이 달리는 경우도 없다.

국내 대중예술인에 대해서만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며 도덕의 철퇴를 내리치는 것이다. 예술 따로 사생활 따로 보든 사생활에 예술을 종속시키든, 남녀관계를 관용적으로 보든 엄격하게 보든, 각자의 자유고 각각의 사회가 알아서 선택할 일이다. 다만 일관성은 필요하다. 지인과 외국 예술인들에겐 한없이 관대하면서 우리 대중예술인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그 자체로 도덕적이지 않다. 철퇴를 내리치더라도 형평성은 좀 지키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