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잡지 플레이보이를 만든 휴 헤프너가 지난 27일 숨졌다. 향년 91세다. 플레이보이는 그가 195327세일 때 만든 잡지다. 1950년대는 우리에겐 한국전쟁으로 끔찍한 고통을 겪은 참담한 시절이지만, 미국에겐 2차 대전 이후 전개된 역사적 부흥기였다. 이때부터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할 정도의 호시절이 이어졌다

플레이보이는 바로 그런 시기에 나타나 남성들을 유혹했다. 이 시기엔 물질적 부흥과 더불어 성 혁명이라고까지 할 정도의 문화적 격변도 나타났다. 미국은 원래 청교도 윤리에 기반한 보수적인 나라였지만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그 자유분방한 나라로 바뀌어간다. 플레이보이는 이런 시대의 한 아이콘이었다. 뉴욕타임스가 헤프너와 플레이보이 브랜드는 자신들을 성 혁명의 상징이자 미국식 엄숙주의와 사회적 편협함으로부터의 탈출구로 내세웠다라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휴 헤프너는 미국의 전통적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 사랑, 섹스등을 상상할 수도 없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가정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그를 더욱 자유분방하게 이끌었다. 1960년대의 히피들도 아버지 세대의 보수성에 반발해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는데, 휴 헤프너는 이런 시대적 흐름을 탔다.

 

단순히 누드사진만 실은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적 가치관을 설파하는 칼럼을 직접 썼고, 유명 필자의 글도 실었다. 지미 카터, 사르트르, 마틴 루터 킹, 트럼프 등 저명인사의 인터뷰도 유명했다. 나름 개념 있고 내용 있는 잡지를 표방한 것이다. 그래서 도색사진을 실으면서도 신사가 구독하기에 덜 부끄러운잡지로 자리매김했다. AP통신은 돈과 여유가 있는 남성들을 위한 성경이 되었다라고 했다. 좋은 기사들이 인정받으면서 우리나라에도 플레이보이로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핵심 상품은 여성의 성적 대상화일 수밖에 없었다. 창간호부터 마릴린 몬로의 누드 사진으로 파란을 일으켰고, 그후로도 플레이보이지는 여성 누드 사진의 대명사였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음란물이었던 것이다. 여성들을 토끼 귀와 꼬리를 붙인 바니걸로 만들어 클럽에서 일하도록 하기도 했다. 점잖은 기사들은 이런 상업적 전략을 덮기 위한 포장 정도였다고도 할 수 있다.

 

승승장구하던 플레이보이에게 치명타를 가한 건 인터넷이었다. 야동, 야사(야한 사진)가 범람하는 인터넷에 잡지가 대적하긴 어려웠다. 한때 플레이보이는 누드사진을 없애는 실험까지도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제 플레이보이는 잡지가 아닌 브랜드 가치로 1조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인다. 잡지는 무력화되고 찬란했던 시대의 유산인 브랜드 가치만 남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91세 휴 헤프너의 사망이 한 시대의 종언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 음란물, 즉 금서였던 플레이보이는 누드사진을 없애고 한국에 진출했다. 바로 올해 있었던 일이다. 과거에 진출했다면 엄청난 화제였겠지만 2017년의 플레이보이 진출은 별 충격이 없었다. 시대가 달라졌다.

 

한국의 경우, 음지의 세계에서 명성을 누리던 플레이보이가 본격적으로 화제에 오른 건 1997년 이승희 신드롬 때부터였다. 이승희라는 사람이 동양인 최초로 플레이보이 메인 모델이 됐다며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말하자면 월드스타 대접을 받은 것이다. 노란나비로도 불린 그녀는 한국에 와 성대한 환영을 받고 CF 촬영까지 했다. 사실은 메인 모델이 아니라 일반 모델이었지만, 뭐가 됐든 간에 그 유명한플레이보이에서 한국계가 모델이 됐다는 것 자체가 우리 국민을 흥분시키고 자부심을 고취시켰다.

그런데 당시 플레이보이는 음란물이었다. 불과 5년 전인 1992년에 마광수 교수를 구속시켰던 나라다. 음란에 대해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경계했던 그런 나라에서 플레이보이 모델이 국민영웅 대접을 받았다.

 

국위선양에 목을 매던 시절이다. 음란물 모델이라도, 하여튼 서양에서 유명한 잡지에 한국계가 나온 것이 그렇게 반갑고 뿌듯했다. 그런 모델의 활동으로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올라갈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을 정도로 당시 국위선양을 바라는 국민의 애가 탔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진짜 월드스타, 즉 한류스타가 생긴 후에야 해외에서의 낭보에도 차분히 대처하는 여유가 생겼다. 심지어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에 올라갔다고 해도 별 반응이 없을 정도다. 플레이보이 한국계 모델의 존재에 나라가 발칵 뒤집혔던 시절에서 이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승희 신드롬 후 20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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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하재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