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예능 음악 칼럼

크레용팝, 팬티환란 속에서 피어난 B급의 쾌감

 

크레용팝이 드디어 대세에 등극했다. 6월 말에 공개한 <빠빠빠> 음원이 무려 44일 만에 음원차트 1위에 올라서고, 곳곳에서 <빠빠빠> 안무 패러디 영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주말엔 <SNL 코리아>와 <인간의 조건>에서 패러디 안무가 방영됐다. 이외에도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잇따라 패러디 영상을 만들면서 <텔미> 열풍의 초기를 방불케 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라 이젠 크레용팝을 TV에서 안정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댄싱퀸>을 발표했을 당시만 해도 한 달 간 지상파 주말쇼프로그램 전체를 통틀어 약 2회 정도 출연한 것이 다였다. 그후에도 한 곡으로 한 주 출연하면 다시 보기 어려웠는데, 이번 <빠빠빠>의 경우는 발표 첫 주에 출연한 후 2~3주 후에 다시 모습을 보이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크레용팝은 그동안 동대문, 명동, 홍대 등지에서 길거리 콘서트를 하며 활동했었다. 그랬던 이들이 마침내 가요계 주류의 문턱에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것이다. 카라 이후 가장 입지전적인 걸그룹 성공 스토리다. 크레용팝 팬의 입장에선 감격적이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순간이다. 좋아하는 팀이 고생하다 뜨니까 감격적인 것이고, 혼자 좋아했었는데 이젠 다수 대중과 함께 해야 하니까 아쉽고, 그런 것일 게다. 어쨌든 이제 크레용팝은 소수 마니아팬들의 품을 벗어나 대중의 바다에서 항해를 시작했다.

 

 

크레용팝이 <댄싱퀸>으로 충격적인(?) 코믹함을 선보였을 때 걸그룹계에선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시장이 포화된 상태에서 수많은 신인그룹이 밀려들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설국열차>에서 이미 기차 꼬리 부분 차량이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람들이 떼로 밀려들어온 것과 같은 형국이다. 당연히 아비규환의 생존경쟁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 무기는 ‘섹시’였다. 그 경쟁의 와중에 팬티패션이란 전대미문의 신조어까지 탄생했을 정도니, 얼마나 걸그룹들의 섹시분투가 치열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설국열차>의 군중이 양갱으로 생존했다면, 이즈음 한국 걸그룹은 팬티로 생존했던 것이다. 안무도 최대한 섹시함을 자극하는 쪽으로 발전해서, 최근엔 집단 봉춤까지 나타났다.

 

하지만 상황은 집단 궤멸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모두 다 비슷한 컨셉을 내세웠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었던 것이다. 집단 섹시의 과다 현상은 일종의 시각적 공해를 초래했고, 시청자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점점 누가 누군지 구별이 힘들어졌다. 쇼프로그램의 화려한 무대를 이탈해서 진짜 인간의 느낌이 있는 리얼예능으로 피신하는 시청자가 많아졌다.

 

하지만 크레용팝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건 B급 ‘병맛’이었다. <댄싱퀸>에선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빛 아래에서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춤을 추는 ‘웃픈’ 아가씨를 형상화했다. 아비규환의 ‘팬티 격전’이 벌어지는 중앙무대가 아닌, 변방의 길거리를 활동무대로 선택했다. 확성기를 들고, 80년대에 힙합을 창조한 브레이크댄스팀이 그랬던 것처럼 대형 카세트뮤직센터를 들고 길거리를 누볐다.

 

이것은 확실한 차별화로 작용했다. 하의가 실종되지 않은 걸그룹이며 엉덩이를 흔들지 않는 걸그룹이니까. 길거리를 누비며 외롭게 홍보하는 모습은 ‘나라도 이들을 지켜줘야겠다’는 팬들의 결의를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작지만 뜨거운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카라 때는 고무장갑이 상징이었지만, 이들에겐 트레이닝복이 상징이었다. 그렇게 커나간 팬덤이 이번 <빠빠빠> 파동의 원동력이 됐다. 한 케이블 TV 쇼프로그램에선 트레이닝복에 헬멧을 쓴 팬들의 애타는 직렬 5기통 응원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빠빠빠>의 직렬 5기통 춤은 기본적으로 유쾌하다. 너무 성적인 느낌이 강한 안무보다 이렇게 유쾌한 느낌을 주는 안무가 더 대중적으로 폭 넓게 성공할 가능성을 가진다. 또, 아이 같은 귀여운 느낌도 있는데, 이것도 <아빠 어디 가>의 아이들이 예능 대스타들을 물리치는 요즘 트렌드와 어울렸다.

 

크레용팝은 유치하고, 코믹하고, 어린아이 같은 콘셉을 내세우지만 사실은 대단히 탄탄한 실력이 뒷받침되어 있다. <댄싱퀸> 이래의 무대를 보면 막춤을 추는 것 같아도 그 속에 각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웃기는 춤 근저엔 치열한 연습으로 다져진 내공이 있는 것이다. 바닥에서부터 성장한 팬덤과 이들의 차별적인 개성, 그리고 실력이 오늘의 성공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카라, 소녀시대 이후 일본시장을 강타할 만한 신인 걸그룹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한류의 문제였다. 크레용팝은 이 부분에서도 돌파구가 될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이 있다. 열혈 마니아적 팬덤 즉 ‘덕후’를 양산하는 자질에, 실력과 귀여움을 동시에 갖췄기 때문에 일본시장에서의 성공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SNS다. 이 팀의 경우 벌써부터 부주의한 SNS 활용으로 위험신호가 감지됐다. SNS 활동은 자제하고 컨텐츠에 집중해야, 요즘엔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인터넷 악플 사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