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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한국 여성을 김치녀라고 하는 시대

 

 

작년까지만 해도 ‘김치녀’라는 단어는 방송에서 사용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엔 방송에 나오는데, 그건 그만큼 이 단어가 광범위하게 쓰인다는 의미다. 방송사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회현상이 되었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방송되는 것이다.

 

김치녀가 반인륜적인 표현인 이유는 여성 일반에 대한 혐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2000년대 초반 등장한 ‘된장녀’였다. 이때만 해도 여성 일반이 아닌 일부 사치스럽고 허영에 들뜬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여기서 된장은 욕설의 의미를 담았다고 알려졌다. 인터넷에선 ‘시발’을 순화한 것이 ‘젠장’이고, ‘젠장’을 순화한 표현이 ‘된장’이라고 설명된다. 즉, 된장녀는 욕 나올 정도로 허영에 찌는 여성만을 구분해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김치녀에서 김치는 욕설이 아닌 한국을 상징하는 음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김치녀라고 하면 한국여성 일반을 의미하게 되어 된장녀하고는 차원이 다른 말이 됐다. 가리키는 범위는 다르지만 의미는 그대로 이어져, 김치녀도 사치스럽고 허영에 찌든 성격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남성에게 의존적인 성격까지 내포하게 됐다. 결국 한국 여성 전체에 부정적인 낙인을 찍은 것인데 이렇게 성별, 국적 등의 범주로 사람들을 싸잡아 낙인찍는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그래서 김치녀가 반인륜적인 표현이라고 한 것이다. 요즘 이러한 표현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 흉흉한 김치녀 신드롬 -

 

처음에 된장녀는 인터넷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됐었는데, 그 속에 담긴 여성혐오적 의미를 폭발적으로 발전시킨 건 ‘일베’였다. 일베에선 한국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김치녀, 여성을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는 ‘삼일한’, 여자인 게 벼슬이라는 ‘보슬아치’ 등의 표현이 범람했는데 그것이 다시 일반 인터넷 세상으로 나왔다. 특히 김치녀는 이제 방송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일상어가 된 느낌이다.

 

2013년 하반기에 한 예비군 동원훈련장에서 강연자가 "우리나라에서는 김치녀와 된장녀 때문에 여자를 만나기도 힘든데 북한에서는 500만 원이면 된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올 초 한 신문사 기자가 신촌 일대에서 20~3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100%가 김치녀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고, 그 뜻에 동의한다고 답한 사람이 61.5%, 김치녀라는 말을 써본 적이 있다는 사람이 25%라는 결과가 나왔다. 물론 한 기자가 특정 지역에서 수행한 설문이라서 과학적인 조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김치녀 현상이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유추할 방증은 된다.

 

이렇게 김치녀 현상이 커지자 올 초 고려대학교엔 ‘김치녀’로 호명되는 당신, 정말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붙었고 뒤이어 ‘김치녀가 될 수밖에 없어서 안녕하지 못합니다’ 등 호응하는 대자보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보통 사회적인 주장을 하는 대자보는 당당히 실명을 밝히게 마련이다. 그런데 김치녀 현상을 비판하는 대자보는 대부분 ‘고민 많은 10학번 여학생 C양’이라는 식으로 실명을 감췄다. 이것은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분노, 그리고 공격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비하하는 데에 몰두하던 남성들은 한 여성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하자’ 그녀를 매장시킬 듯이 공격했다. 이화여대 앞에서 여성혐오 시위를 벌이던 남성이 연행된 사건도 있었다. 여성의 경범죄 정도가 인터넷으로 알려지면 ‘00녀’라 이름 붙이며 집단공격을 가한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들도 자신이 ‘00녀’로 찍히며 공격당하는 사태를 우려한 것 같다. 그럴 정도로 김치녀 신드롬은 흉흉하다.

 

- 마침내 음원차트까지 점령한 김치녀 신드롬 -

 

얼마 전엔 심지어 김치녀 신드롬을 담은 노래가 음원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브로라는 무명 신인가수의 <그런 남자>였는데 이렇다 할 마케팅도 없이 떴다. 이 노래는 ‘키가 크고 재벌 2세는 아니지만 180은 되면서 연봉 6000인 남자 ... 내가 만약 그런 남자라면 ... 미쳤다고 너를 만나냐 ... 왕자님을 원하신다면 사우디로 가세요 일부다처제인건 함정. 네 가슴에 에어백을 달아도 눈 밑에다 애벌레를 키워 보아도 숨길 수 없는 단하나의 진실 너는 공격적인 얼굴이야’라며 일베의 여성혐오 정서를 담았다. 가수가 실제로 일베 사이트에 글을 올리며 ‘일밍아웃(일베 사용자임을 드러냄)’하기도 했다. 대중의 여성혐오 정서가 이제 실제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남성들의 자신감 하락에 기인한다. 외환위기 이후 남성들의 경제적 능력은 하락했는데 여성들의 요구는 더 커졌다. 럭셔리한 데이트와 이벤트와 선물과 집, 한 마디로 배우자의 경제력을 요구하는데 이를 들어줄 능력이 없는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원망을 키웠다. 늘어나는 여성의 사회진출도 남성의 위기감을 부채질했다.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긴장에 따른 스트레스를 약자인 여성에게 푸는 측면도 있다.

 

문제는 대중문화가 김치녀 신드롬과 여성이 집단적 화풀이의 대상으로 찍히는 데에 일조한다는 점이다. 이례적으로 남성에게도 환영받은 멜로영화인 <건축학개론>의 경우 여성을 ‘쌍년’으로 묘사해 히트했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돈 많은 남성을 선망하며 끝까지 남성에게 의존하는 ‘된장녀/김치녀’였다. 여성혐오가 작품에 반영돼 히트하고, 그런 작품을 통해 혐오정서가 다시 강화된다.

 

드라마 속에서 여주인공과 관련해 의례히 터지는 논란이 ‘민폐 논란’이다. 여주인공이 스스로 해내는 일 없이 남한테 의존하며 심지어 일처리를 방해하기까지 한다는 건데, 민폐 계보는 <추노>의 이다해부터 시작해 최근 <신의 선물 14일>의 이보영까지 이어진다. 이건 드라마가 기본적으로 남성만을 문제해결의 주체로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여성은 철저히 남성의 도움과 보호를 받고 남성의 경제력을 통해 인생역전하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것이 바로 <상속자들> 같은 신데렐라 드라마의 법칙이다.

 

집단토크쇼에서 여성들이 이벤트와 명품백 토크를 하는 건 예능의 관습이다. 드라마에선 서민 캐릭터라도 여주인공에게 명품백을 안긴다. <런닝맨>,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에서도 여성은 언제나 남성의 도움을 받는다. 주말예능에서 남성들이 소탈한 인간미를 보여줄 때 여성은 토크쇼에서 남편과 시댁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주말드라마에선 시어머니와 악녀들이 악을 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화해 인터넷의 김치녀 신드롬과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그런 남자>처럼 대놓고 여성을 조롱하는 노래가 음원차트 1위에까지 오른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 요구와 남성의 경제적 불안은 계속되고 대중문화의 관습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에, 김치녀 신드롬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