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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음악 칼럼

아나테이너의 비상과 몰락

 

아나테이너의 비상과 몰락


 2007년은 아나운서의 예능프로그램 진출이 눈부셨던 한 해였다. 점잖은 아나운서의 화려한 변신은 ‘아나테이너’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각 방송사는 경쟁적으로 자사 아나운서 스타화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결과는 부정적이다. 시청자의 호응이 갈수록 시들해졌다.


 방송사는 물량위주 아나운서 투입까지 서슴지 않았었다. MBC는 <지피지기>에 서현진, 손정은, 최현정, 문지애 등 4명의 여자 아나운서를 한꺼번에 출연시켰다. 서현진, 문지애 아나운서는 다른 예능프로그램에도 동시에 투입됐다. SBS는 <일요일이 좋다>의 <기적의 승부사> 코너에 자사 아나운서 5명을 대거 투입하기도 했다. KBS는 <상상플러스>에 노현정, 백승주, 최송현 아나운서를 연이어 출연시켰다. <해피선데이>의 <하이파이브> 코너엔 이정민 아나운서가 나왔다. 한 방송사 아나운서국장은 ‘3년 안에 연예인에게 뺏긴 자리를 되찾겠다’며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노현정 아나운서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상상플러스>를 통해 노현정 아나운서는 범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노현정 아나운서 이후 ‘아나운서’는 ‘건수’ 고갈에 시달리는 방송사, 예능기획자, 연예언론사들의 블루오션이 됐다. 방송사가 예능에 아나운서들을 내보내면 언론은 아나운서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했다. 아나운서들은 졸지에 스타가 됐다. 각종 특집프로그램에 아나운서들이 나와 춤을 추고 게임을 했다. 한동안 모두가 좋은 것처럼 보였다.


 곧 역풍이 불었다. 시청률이 떨어졌다. 그러자 아나운서들을 소재로 ‘장사’를 하던 언론이 곧바로 등을 돌려 ‘아나테이너’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여론의 악화로 방송사 아나운서실도 아나운서의 연예인화에 제동을 걸었다. 아나운서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프로그램은 사라지거나, 혹은 아나운서가 그곳에서 하차했다. 아나운서 열풍의 진원지였던 <상상플러스>는 연예인이 점령했다. ‘3년 안에 연예인에게 뺏긴 자리를 되찾’는 것은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인다.


 방송사의 아나운서 연예인화 ‘과소비’의 후유증은 아나운서의 위상 실추로 나타났다. 아나운서가 예능에 나와 ‘잘 했으면’ 괜찮았을 것이다. 아나운서가 품위를 잃었다는 지적이 위상 실추의 이유가 아니다. ‘못 했다’는 것이 진정한 이유다. 단기간에 지나친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나친 기대로 이어졌고, 아나운서들은 지나친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없었다.


 천천히 조금씩 적응했더라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꺼번에 융단폭격식으로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여자 아나운서 여러 명이 주르르 앉아 있는 모습은 흡사 꽃이 진열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희소성이 사라지자 가치가 격하됐다. 방송사가 자신이 보유한 아나운서라는 소중한 자원을 스스로 훼손한 셈이다.


-조급증이 화를 부른다-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쏠림 현상은 악명이 높다. 문화선진국은 문화가 넓고 깊은 나라다. 이런 나라는 문화의 각 영역이 모두 뿌리가 튼튼해 시장의 잔파도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뿌리가 약하고 가지가 빈약한 문화는 잔바람에도 이리저리 몸통째 휘어진다. 우리 대중문화의 현실이 이렇다.


 줌마렐라, 아줌마 판타지 포맷이 장사가 된다 싶으면 그런 기획이 쏟아진다. 리얼버라이어티가 장사가 된다 싶으면 모든 예능이 ‘리얼’ 분위기로 돌아간다. R&B가 뜨면 모든 가수가 다 R&B를 하고, 일렉트로니카가 뜬다 싶으면 어제까지 힙합, R&B, 발라드를 했던 가수들이 일제히 일렉트로니카로 변신한다. 영화도 그렇다. 조폭물이 돈이 된다싶으니까 조폭물이 쏟아졌고 한국영화에 대한 신망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아나운서가 예능에서 가지는 가치는 ‘희소성’과 ‘의외성’이었다. 방송사는 노현정의 거대한 성공을 보면서 그 ‘스타성’에만 눈이 멀어 스스로 ‘희소성’과 ‘의외성’을 없애버렸다. 그러자 ‘스타성’도 무너져갔다. 한시라도 빨리 최대한 자원을 투입해 시청률극대화를 얻겠다는 조급증이 ‘아나테이너’ 쏠림 현상을 낳았고, 얻은 것은 ‘스타성’이 아닌 ‘식상함’이었던 것이다. 신무협, 신느와르 양산으로 몰락한 홍콩영화계, 조폭물 양산으로 추락한 한국영화계와 같은 모양새다.


 천천히 한 명씩, 티 안 나게, 인내심을 가지고 키웠으면 방송사는 결국엔 많은 스타아나운서를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나운서들도 한 명 한 명 더 성공적인 방송활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방송사의 조급증과, 기사소재가 필요했던 언론사의 조급증, 그리고 그런 흐름이 싫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아나운서들의 조급증이 쓸쓸한 결과를 낳았다.


-아나운서의 직업정체성 확립이 필요한 때-


 다음 국어사전에 의하면 아나운서의 정의는 이렇다,


 ‘뉴스 보도, 사회, 실황 중계의 방송을 맡아 하는 사람. 또는 그런 직책.‘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뉴스 보도는 기자들이 직접 하는 추세다. 피디저널의 경우는 피디가 직접 한다. 토론 사회도 각종 전문가들이 한다. 예능프로그램 사회는 연예인들의 정글이다. 아나운서가 설 곳이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요즘 예능은 상호비방-막말-발목잡기가 트렌드다. 아나운서는 원래 상대방을 배려하며 바른말 고운말하는 것을 연습했던 사람이지, 약점 잡아 치고나가는 것을 익혔던 사람이 아니다. 또 요즘엔 적나라한 ‘리얼’과 단짝이 아닌 ‘앙숙’이 트렌드다. 아나운서는 적나라한 것을 점잖게 포장하는 직종이고, 누구랑 앙숙이 되어 아옹다옹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외모나 재치로도 기존 연예인을 뛰어넘기 힘들다는 것이 드러났다. 아나테이너에게 예능은 쉬운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아나운서가 되려고 맹렬히 경쟁한다. 방송3사 아나운서 경쟁률은 수백대 1이다. 아나운서 시험 준비로 3,200만 원을 소비한 사람의 사례가 알려지기도 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는 걸까? 유명해지면 이직하고, 결혼하면 그만 두고, 딴 길 보이면 그만 두는 정거장으로서? 지금 이 순간 일부 아나운서 지망생들은 아나운서를 신데렐라가 되는 통로, 연예인이 되는 통로로 기대하면서 막연한 환상 속에서 아나운서 준비를 하는 게 아닐까?


 아나운서의 프로그램 출연료가 형편없이 낮다는 말들이 자주 나온다. 아나운서는 안정된 직장인이다. 연예인과 출연료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연예인에게는 월급이 없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은 연예인과 출연료를 비교한다. 방송사의 직업 방송인이라는 정체성과 긍지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방송사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를 부추기면서 이런 혼란을 자초했다. 유명 아나운서의 잇따른 퇴사로 방송사도 결국 피해자가 됐다. 지금과 같은 구도에선 방송사의 자원을 투입해 기껏 키운 아나운서를 기획사가 채가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아나운서들이 저마다 그런 선배를 선망하게 되면 시청자는 연예인 지망생 아나운서의 ‘마음이 잿밥에 있는’ 행태만을 봐야 할 것이다.


 방송사가 달라진 시대에 걸맞는 아나운서의 직업정체성을 규정해야 한다. 예능이든 교양이든 정확히 갈래를 정하고 그에 맞게 근무하도록 해야 한다. 쇼프로 나가서 춤추라고 했다가, 뉴스 진행하라고 했다가, 튀라고 했다가, 품위를 유지하라고 했다가 하며 시청률에 우왕좌왕하면 난맥상은 계속된다. 퇴사하는 아나운서들만 탓할 것이 아니라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할 길을 모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