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에 북한은 미국에게, 자기들 주권을 존중하고 구속력 있는 약속을 할 것, 북한의 경제 발전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선언할 것과 핵문제를 걸고 협상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협상 제안을 무시했다. 당시 대북 정책을 주도한 부시 정부의 네오콘은 이념적 선악관을 내세웠기 때문에 실용적 협상이 어려웠다. 그들은 북한을 압박하면 북한이 무릎 꿇을 거라고 오판했다. 

북한은 결국 200610월에 핵실험을 감행한다. 그러자 비로소 20071월에 미국은 북한과 협상을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핵개발 초기에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북핵은 점점 고도화됐다. 어쨌든 뒤늦게 대화가 시작됐는데 검증 문제를 놓고 교착에 빠진 사이에 2008년 미국 대선이 가까워졌고 부시 정부와의 대화는 흐지브지 됐다. 

이런 경험이 북한에게 벼랑 끝 전술에 대한 확신을 심어줬을 수 있다. 북한을 무시하고 압박만 하던 미국이, 북한이 무력도발을 하니까 비로소 협상 테이블에 나왔던 경험 말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타개하고 상대방의 관심을 이끌어내려면 강하게 도발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됐을 수 있다.

 

부시 정부 이후에 등장한 오바마 정부는 전략적 인내정책을 추구해, 북한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또 시간만 흘러갔고 북핵은 고도화됐다. 북한이 마침내 ICBM, SLBM 도발에까지 나서자 비로소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것도 도발하면 국면이 전환된다는 북한의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도발로 대화를 이끌어내는 방식이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오바마 정부 초기에도 북한은 도발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할 즈음에 로켓발사 및 핵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이것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불신을 한껏 높였다. 당시 유엔 경제 제재가 강화되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문을 닫아버렸다. 

극단적인 도발 횟수가 누적되면서 북한에 대한 불신이 점점 더 고조된다. 이러면 미국과 한국 내에서 반북 여론이 커지고, 대북협상을 추구하는 세력의 입지가 좁아진다. 결국 북한이 원하는 안전보장 협상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도발보다, 믿을 수 있는 대화 상대라는 신뢰감을 쌓아가는 것이 북한에게 득이 될 길이다.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로부터 시작된 최근 북한의 도발은 한계에 몰린 북 당국의 대내외적 필요성에 의한 선택인 것으로 보인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준하는 경제위기와 외교실패에 따른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한 외부 때리기, 그리고 약속과 기대를 저버린 한국에 대한 원망 표현, 북한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국과 미국을 움직이려는 충격파 말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 우악스럽고 폭력적이다. 음식점 주방장을 내세워 우리 지도자를 능멸하게 하거나, ‘철면피함과 뻔뻔함, 역스럽다등 공식 담화로 막말을 해댔다. 이러면 우리 국민 사이에 북에 대한 반발심만 커진다. 국제사회의 불신도 누적될 것이다. 남측 예산이 투입된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도, 향후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깎아내린 자충수였다.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인 대북 행보로 전환하려는 시점이었다. 그때 북한이 도발하면서 우리 정부 운신의 폭을 좁혔고 또다시 시간만 흘려보내게 생겼다.

 

과거에도 북한이 실기한 적이 있다. 19995월에 미국의 페리 전 국방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로 북한을 방문했다. 200010월에 북한의 조명록 차수가 워싱턴에 답방해 북미 간 적대적 의도를 종식시키겠다는 공동 발표가 나왔다. 바로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했고, 클린턴 대통령 방북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또 대선이 문제였다. 임기가 다 된 클린턴 대통령은 이 문제를 다음 정권으로 넘겼는데, 네오콘의 부시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북한이 조명록 차수의 답방을 1년이라도 앞당겼다면, 클린턴 방북이 성사되고 북미 수교와 종전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대북협상에 적극적인 클린턴 정부시기에 북한이 15개월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결과 부시 정부를 맞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대북 협상에 적극적이다. 북한 입장에선 이럴 때 진정성 있게 대화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거꾸로 막가파 말폭탄을 쏟아 부어 이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자살골이다. 만약 앞으로 추가도발이 강도 높게 이어지면 북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할 것이다. 북이 그토록 원하는 제재완화로부터 점점 멀어질 길이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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