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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오영수 수상, 골든글로브도 꺾은 한류

 

《오징어 게임》의 오영수가 한국 배우 최초로 미국 골든글로브 연기상을 받았다. 남우조연상이다.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수상은 불발됐다. 후보에 오른 것만 해도 한국 최초의 사건이었고, 골든글로브에서 한국어 작품을 이런 부문의 후보로 지명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요즘 미국 영상계는 다양성을 확대하고 차별을 시정하는 데 앞장서는 분위기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기생충》에게 작품상 등 핵심 4개 부문 상을 몰아주면서도 정작 배우들을 외면한 것에 대한 비판이 나오자 바로 다음 해에 한국인인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을 시상한 것이 그런 흐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넷플릭스 제공

골든글로브 쇄신 바람 커진 가운데 수상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완고하게 보수성을 지켜왔던 시상식이 골든글로브였다. 골든글로브는 미국을 대표하는 방송 영화 시상식 중 하나이며 아카데미상의 전초전이라고도 불린다.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가 주관하는데, 바로 이 HFPA의 보수성이 그동안 악명 높았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기생충》도 골든글로브에선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했다. 심지어 《미나리》는 미국에서 제작된 미국 영화인데도 한국어 대사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외국어영화로 분류해 맹비난을 받았다. 과거 유럽어가 많이 나오는 영화는 외국어영화로 분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 구도가 확연했다. 

 

그랬던 골든글로브가 이번에 한국에서 제작된 한국어 드라마를 무려 작품상 후보에까지 올리고, 남우조연상 시상까지 한 것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완고한 골든글러브라도 배타적인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한류와 《오징어 게임》 열풍이 거셌다. 《기생충》과 《미나리》를 외국어영화로 분류한 것에 대해 워낙 큰 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제공

사실은 작품상과 남우주연상도 어느 정도 기대됐던 부문이었다. 워낙 다양성과 차별 해소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컸고, 《오징어 게임》 돌풍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올해 초유의 파행 사태를 맞았다. HFPA 회원 중 흑인이 단 한 명도 없는 등 인종차별 문제가 컸고, 그 밖에 부패 스캔들이 알려졌으며 성차별 논란까지 터졌기 때문이다. 미국의 스타 배우들과 영화사들이 골든글로브 보이콧을 선언했고, NBC 방송사는 중계를 취소했다. 결국 시상식 자체가 무산되고 수상자만 온라인으로 발표했다. 

 

이 정도까지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쇄신 이미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 마침 그들이 그동안 박대했던 한국어 작품이 올해 최고 인기작으로 떠올랐으니, 전폭적인 시상에 나설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만 시상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타협은 하면서도 핵심적인 보수성은 지켜 가려 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렇게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에서마저 보수성을 지켜 가려는 시상식에서, 한국어 작품으로 받은 남우조연상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큰 것이다. 비록 작품상 수상은 불발됐지만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았던 골든글로브에서 주요 부문 후보 지명과 조연상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오징어 게임》 또는 한류가 세계 대중문화의 주류 반열에 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CBS, CNN, 포브스 등 미국 언론들도 오영수가 한국 배우 최초로 글든글러브를 수상했다는 점을 알렸다. 

 

이번 골든글로브 보이콧 사태는 미국 문화계의 저력을 보여준 측면도 있다. 한국에서 차별에 항의하며 최고의 대중문화 행사를 모든 배우와 영화사가 보이콧하는 일이 쉽게 가능할까? 이런 일을 감행하고, 머나먼 한국이란 나라의 영화, 드라마에 기꺼이 상을 주는 나라가 미국이다. 바로 이래서 미국 대중문화계의 글로벌 리더십이 유지되는 것인데, 그런 미국 대중문화계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로 한류가 우뚝 섰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 콘텐츠를 빼놓고는 미국과 세계 대중문화 트렌드를 논하기 힘들 지경이다. 그래서 결국 골든글로브도 높던 콧대를 일부 꺾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넷플릭스 제공

승려 전문 배우였던 오영수 

오영수는 《오징어 게임》에서 반전의 주인공 역할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골목길 구슬치기 깐부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황동규 감독의 《남한산성》 출연이 불발돼 이를 아쉬워한 감독이, 대학로로 찾아가 오영수 연극을 보고 차기작 출연을 부탁했다. 그 차기작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1944년 황해도 해주 서당 훈장집에서 태어나 월남했다. 1963년 연극을 시작했는데 수입이 너무 없어 성우로도 활동했다. 그러다 월급이 나오는 국립극단 단원으로 1987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했다. 성우와 국립극단 단원을 했다는 건 연기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200편이 넘는 연극에 출연했고 동아연극상 남자연기상, 백상예술대상 남자연기상, 한국연극협회 연기상 등을 받았다. 

 

하지만 영상 쪽에선 승려 이미지로만 알려졌다. 간간이 단역 출연만 하던 그가 2003년 영화 《동승》과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비로소 주연을 맡았는데 둘 다 승려 역할이었다. 2009년 MBC 드라마 《돌아온 일지매》와 《선덕여왕》에서도 승려 역할로 나왔다. 2008년 LG 싸이언 와이폰 광고와 2015년 SK텔레콤 광고에서도 승려 역할이었다. 이렇다 보니 그동안 승려 전문 조연 이미지가 강했다. 《오징어 게임》으로 데뷔 58년 만에 일반 대중에게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은 셈이다. 

 

배우 생활을 오래 하기 위해 두뇌 관리 차원에서 바둑을 아마추어 6단 수준으로 연마했고, 평행봉으로 체력을 단련했다고 한다. 그런 노력 덕분인지 《오징어 게임》 줄다리기 신 촬영 때 장문의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해내 현장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고 한다. 

 

《오징어 게임》 공개 이후 '깐부'를 내세운 치킨 프랜차이즈 광고 섭외를 받았으나 작품의 의미를 훼손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지금도 대학로에서 연극 《라스트 세션》을 공연하고 있다. 골든글로브 수상 소식 직후 오영수가 출연하는 회차가 모두 매진됐다.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윤여정의 배우 정신이 조명받았다. 청순 로맨스부터 시작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모, 고모, 엄마, 할머니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길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역할에 도전했다. 연극에 천착해온 오영수의 배우 정신에도 관심이 쏟아진다. 우리에게 이런 소중한 원로 배우들이 있다는 걸 미국 시상식이 새삼 일깨워줬다. 우리 드라마, 영화가 너무 젊은 배우들 위주여서 중년 이상 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지금의 관심을 계기로 앞으로 중년 이상 배우들의 역할도 더 다양하게 확대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