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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추노, 국가가 이다해 옷을 입혀준다고?

 

국가가 추노 논란장에 쳐들어왔다. 방통위가 <추노>의 선정성과 폭력성이 짙다며 의견제시 조치를 취한 것이다. <추노>식으로 말하자면‘방통위 나그네’가 저자에 기찰을 나와, 알아서 기라고 마패 슬쩍 보여준 셈이라고나 할까? 드라마 속에서 국록을 먹는 ‘포청 나그네’의 한 마디에 설설 기었던 백성들처럼, 드라마 제작진도 ‘방통위 나그네’의 의견제시에 움츠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사 <추노>가 정말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직접 개입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더욱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막말로 국가가 <추노>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민간의 창작물에 국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중에 국가가 개입할 정도로 문제성이 심각한 작품은 <공부의 신> 하나 정도밖에 없다. 여기에는 일류대지상주의, 일등지상주의, 입시교육조장 등을 이유로 경고할 만하다. 그 이외엔 문제성이 웬만큼 있다 하더라도 공론장의 자정에 맡겨야 한다. 욕을 해도 시민들이 하는 것이지, 국가까지 나서서 욕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기다.


게다가 <추노>는 그다지 문제성도 심하지 않은 작품이다. <추노> 논란은 작품 자체의 폭력성이나 선정성 때문이 발생하지 않았다.


먼저 폭력성의 경우, <추노>는 일종의 무협 판타지 액션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폭력성의 잣대를 들이대는 건 코미디다. 같은 칼이라도 현대 조폭물의 칼과 퓨전사극 속의 칼은 다르다. 국가가 이 차이를 구분 못하고 마구 개입하면, 한국에서 무협사극이라는 장르 자체의 씨가 마를 것이다.



그다음 선정성의 경우. <추노>의 선정성 논란은 추노꾼 노출과 이다해 논란이 그 핵심이다. 먼저 추노꾼 노출은 최근 전개된 초콜릿 복근 열풍의 한 흐름으로서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새삼스레 선정성을 문제 삼을 수준은 아니었다.


이다해 문제는 <추노> 논란의 핵심중의 핵심인데, 이것도 국가가 나설 만한 일은 아니다. 이다해 논란은 선정성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대중이 이다해를 집단적으로 공격하면서 커진 사태인데, 여기엔 다른 문제들이 깔려있다.


이다해가 욕먹는 건 선정성 하나 때문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도 때문이다. 신부화장, 선녀소복과 답답하고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 성격 등 때문에 이래저래 찍힌 것이다. 어차피 미운 털이 박혀서 선정성까지 욕을 먹는 것이지, 선정성 자체만 떼어내서 보면 국가가 개입할 만큼 다른 드라마들의 표현수위보다 강한 건 아니었다. 어깨선과 가슴선을 주야장천 보여준 것으로 따지면 자타가 공인하는 웰메이드 드라마 <탐나는 도다>도 심했다.


또, 제작진의 뻔뻔함도 문제다. 이다해 겁탈씬의 선정성은 확실히 공론장에서 욕을 먹을 만했고, 제작진도 인정할 만큼 큰 논란을 낳았으므로, 그 이후 제작진의 표현방식이 달라졌어야 했다. 제작진 스스로도 이다해 논란의 문제를 인정하고 표현방식에 변화를 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계속에서 이다해의 어깨선을 보여주며 모자이크를 넣었다 뺐다 하는 ‘장난’만 쳤다. 그래서 이다해를 중심으로 논란이 지속됐던 것이다. 이런 맥락을 제외하고, 저고리를 벗은 모습만 똑 떼어내서 보면 국가가 쳐들어올 정도로 선정적인 샷은 분명히 아니었다.


이다해 논란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중이 이 작품을 진지한 시대극으로 오해한다는 데 있다. <추노>는 결코 진지한 시대극이 아니다. 볼거리를 추구하는 엔터테인먼트형 퓨전사극이다. 이렇게 보면 이다해의 리얼리티를 무시하는 신부화장이나 선녀소복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적당한 노출도 이해가 된다. 어떤 퓨전사극에선 현대의 랩송까지 등장하는데 누가 거기에 리얼리티의 잣대를 들이대던가?


그런데도 대중은 진지한 시대극의 잣대를 들이대서 이다해를 공격했다. 그 바람에 그녀의 표현방식이 모두 문제가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선정성 논란이 터진 것이다. 여기서 선정성이란 단어에만 화들짝 놀라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코미디다.



일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또다시, 제작진의 뻔뻔함이 한몫했다. 진작 제작진이 <추노>를 가벼운 볼거리로 봐달라고 했으면 이다해 논란이 이렇게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볼거리라는데 누가 거기에 진지한 비난을 하겠나. 하지만 제작진은 계속해서 ‘민중’, ‘리얼리티’ 등 <추노>를 진지한 시대극으로 오해할 만한 발언들을 했다. 이다해 표현의 문제도 작품 내의 필연적인 구도상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만 말했다.


이러니까 대중이 점점 더 <추노>에 진지한 시대극의 잣대를 들이대게 되어 이다해가 눈엣가시가 되고, 또 이다해가 작품 내의 필연적인 구도보다 더 황당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자꾸 지적하게 된 것이다.


필연성이고 민중이고 뭐고, <추노>는 기본적으로 시각적인 쾌감을 주는 데 집중하는 작품이다. 장혁이든 오지호이든 이다해든 모두 그 목적에 맞게 표현될 뿐이다. 그것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추노>를 정말 잘 만든 웰메이드 작품으로 격상시켰다. 이점을 인정하고 보면 대부분의 논란은 무의미해진다.


다만 이다해 캐릭터의 답답함과 겁탈씬 문제만이 남는데, 캐릭터의 민폐를 끼치는 답답함은 앞으로 제작진이 알아서 잘 할 일이고 겁탈씬의 부적절함은 이미 공론장에서 충분히 논의가 됐기 때문에, 이제 와서 국가가 쳐들어오는 건 뒷북이고 과잉대응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가 민간 창작물에 우습게 칼 뽑는 것이 진짜 폭력적인 모습이다. 국가가 이다해의 옷을 입혀줄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