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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추노 송태하, 드디어 정신차리나

 

대길 : 내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놈은 누굴 구하겠다고 이러는 거냐? 임금 손잔가, 아니면 언년이인가?


태하 :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언년이란 여자를 모른다고.


대길 : 흥, 네놈도 별반 다르지 않구만. 야비한 양반놈들이랑 말이야.


태하 : 관여치 말라 했을 텐데.


대길 : 니 팔은 니가 흔들어. 내 팔은 내가 흔들 테니까.


19회 도입부에서 송태하는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 언년이란 여자를 모른다고. 뻔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자기 머리 속에 있는 반상의 구분이란 관념과, 자기 부인이 노비라는 현실이 충돌하자, 자신의 관념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답답이 중의 답답이, 찌질이 중의 찌질이다. 이것이 많은 시청자들이 지적한 송태하라는 인물의 한계였다. 이에 반해 태생적으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언년이는 천것과 양반의 구분이 없는 세상이라는 진취적인 지평을 펼쳐 보인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언년이는 필연적으로 혁명적인 의식을 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명문가 출신인 송태하는 말로는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하지만, 뭐가 좋은 세상인지도 모르고 있다.



말하자면 소현세자 가족과 권력에서 밀려난 자신들 일파가 빼앗긴 강남 고급아파트를 되찾겠다는, 그것이 정의 실현이라는, 세상 물정 모르는 강남 도련님과도 같다. 강남 바깥에 있는 수많은 빈민들의 처지는 처음부터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노비로 격하됐어도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년이가 도망 노비냐고 아무리 물어도 자신은 노비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함께 지내던 훈련원 노비들과 도주할 때도 그랬다.


‘내 비록 너희와 같은 밥을 먹었다 하나 근본이 다르거늘 어찌 감히 망발인가.’


송태하는 양반으로만 구성된 세상에서 살았다. 노비처럼 근본이 다른 천것들은 송태하의 세상에 없었다. <추노>는 노비와 민초들의 역동성이 부각되는 작품이다. 그 속에서 주연급을 맡았으면서 이렇게 고루한 성격을 유지했으니, 송태하 캐릭터가 유난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장혁 등의 배우들이 약동할 때 오지호가 유독 존재감이 없었던 것은 연기력 차이에도 원인이 있지만, 이런 캐릭터 성격의 근본적인 답답함에도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장혁이 맡은 대길은 언년이보다 혁명적인 캐릭터다. 양반 자제인 그는 스스로 천것이나 다름없는 추노꾼이 됐다. 바로 노비인 언년에 대한 사랑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대길은 송태하에게 ‘네놈도 양반놈들이랑 다르지 않다’라고 일갈할 수 있었다.



19회 중반에 이르러, 그렇게 대비되는 두 인물의 구도에 변화가 생길 조짐이 보였다. 송태하가 드디어 언년을 인정한 것이다. 언년이 떠나려 하자 송태하는 언년을 잡으며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자신은 여태까지 언년이 말한 세상을 꿈도 꾸지 못했다면서, 앞으로 생각을 정할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말이다.


강남 도련님 송태하가 드디어 강북에도, 지방에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들 일파가 강남 고급 아파트 되찾아봐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강남 바깥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존엄성을 찾는 게 진정한 변화라는 걸 말이다.


여태까지 단조롭고 답답하기만 했던 송태하란 캐릭터에게 처음으로 유의미한 변화의 계기가 생겼다. 한편 송태하의 동지였던 선비는 좌의정에게 붙어 기득권의 세계로 들어갔다. 타워팰리스 한 채 받고 투항한 것이다. 반대로 송태하는 대길, 언년과 함께 도망노비들의 세계인 월악산으로 들어간다. 철거촌으로 간 셈이다.


감정이입도 안 되고 모호하기만 했던 혁명세력이 두 개로 갈라져 전선이 뚜렷해진 것이다. <추노>가 중반부에 조연들을 마구 죽이면서 내세운 혁명세력 대 좌의정세력의 대립에는 에너지가 없었다. 양쪽 다 그 나물에 그 밥인 양반들이기 때문에 전선이 형성되지 않고 몰살당한 조연들만 아쉬웠던 것이다.


이제 민초들의 에너지가 월악산에 집결하면서 다시 극에 활력이 생기고 있다. 송태하의 변화가 그런 흐름에 힘을 보탰다. 앞으로 대길과 송태하가 함께 ‘팔을 흔드는’ 모습을 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월악산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추노> 3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그나저나 언년과 송태하가 대화를 나눌 때 슬슬 피하며 밖에 나가 땅만 바라보는 대길이 불쌍하다. 흡사, <아이리스>에서 이병헌과 김태희가 대화를 나눌 때 밖을 지키고 있던 김소연처럼 처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