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엔 무려 네 편의 천만영화가 탄생했다. 먼저 1425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이다. 황정민이 연기한 덕수의 삶을 통해 한국전쟁부터 파독광부, 베트남 파병, 이산가족 상봉 등 우리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따듯한 시선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의 고른 지지를 받았고, 중노년 국민들 사이에서 관람 열풍도 일어났다.
이 작품은 우리의 개발시기를 살아낸 국민들에게 ‘우리는 정말 고생하면서 그 시절을 살았지만 우리의 삶은 헛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해줬다. 이것이 기성세대에겐 위안이 되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지금 노년의 빈곤을 겪고 있거나 장차 그런 상황에 처할까봐 불안해 하는 입장이다. 위로가 필요한 때 딱 맞춤한 위로가 당도한 셈이다.
곧이어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1049만 관객을 모았다. 천만 영화는 단순한 재미로는 탄생할 수 없다. 한국의 인구가 5천만 수준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재미 이상의 의미나 시대정신을 담아내야만 인구의 5분의 1을 극장으로 불러낼 수 있다. ‘어벤져스’ 이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어벤져스’가 천만 관객을 모으면서 이 법칙이 깨졌다. 이제 재미만 있으면 천만을 모으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어벤져스’가 순전히 재미만으로 천만영화가 된 건 아니다. 서울촬영이란 ‘떡밥’이 있었다. 헐리우드 히어로 군단이 서울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우리에겐 초유의 이벤트였다. 당연히 범국민적인 관심이 생겨났다. 그것이 천만 사태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설사 ‘서울 떡밥’이 없었어도 천만에 근접하는 수준까진 갔을 것이다.
한국인이 헐리우드 히어로물 블록버스터에 막대한 관심을 가진다는 걸 ‘어벤져스’ 천만 사태가 다시금 보여줬다. 우리 시장이 이렇게 충성하는 한 헐리우드 제작사와 배우들도 한국 시장에 깊은 관심을 보일 것이다. 앞으로 더욱 많은 헐리우드 영화에 한국 모습 혹은 한국 배우가 등장하거나, 헐리우드 스타의 방한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여름엔 쌍천만 사태가 터졌다. 먼저 1270만의‘암살’이다. 대형 스케일과 볼거리, 스타캐스팅, 전지현의 스타일 등이 주효했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한 건 독립군의 분투였다. 이름 모를 독립군의 헌신에 눈물을 흘렸고, 미완의 친일청산엔 분노했다.
‘베테랑’은 놀랍게도 1341만 관객을 모으며 역대 흥행 3위에 올랐다. 지금까지 보도된 재벌 3세들의 막가파식 행태를 총집결한 조태오(유아인)를 정의파 형사 서도철(황정민)이 때려잡는다는 스토리가 관객의 속을 뻥 뚫어줬다.
이상의 흐름을 보면 불황이 한국영화 흥행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걸 알 수 있다. 불황에 불안해진 사람들은 애국주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보이기 시작했다. ‘국제시장’, ‘암살’이 그런 경우이고, ‘연평해전’의 깜짝흥행도 그런 맥락이다. 동시에 북한을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악당으로 혐오하게 되었는데, 그런 시각이 ‘국제시장’이나 ‘연평해전’에 나타난다.
젊은 세대가 느끼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도 흥행에 반영됐다. ‘암살’은 미완의 친일청산에 대한 분노와 연결됐고, ‘베테랑’은 반갑질 정서와 연결됐다. 이병헌을 기사회생시킨 ‘내부자들’도 마찬가지다. 재벌과 그에게 좌지우지되는 공적 질서에 대해 ‘하늘이 안 무너져도 솟아날 길이 없는’ 흙수저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헐리우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예산인 한국영화를 헐리우드에 맞서게 하는 가장 큰 젖줄이 되었다.
배우 오달수는 ‘국제시장’, ‘베테랑’ ,‘암살’에 모두 출연하여 ‘천만요정’이 되었다. 오달수는 보통 코믹하고 인간적인 아저씨 역할로 등장한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이 잇따라 천만을 돌파하는 건 단순히 운이 아니라, 그만큼 관객이 코믹코드와 인간적인 아저씨 코드를 선호한다는 이야기다. 재미와 따뜻한 느낌을 원하는 것이다. 이또한 불황과 연관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젊은 세대의 분노도 당연히 불황과 연결된 것이다. 저성장, 저금리, 저물가, 고실업률 등 뉴노멀 시대의 부산물이다. 연말엔 한 재벌이 20대 신입사원에게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고 해서 원성을 샀다. 이미 그전부터 퇴직 압박을 받아온 50대도 불안에 빠져있다. 이런 정서와 관련된 스토리가 내년에도 사랑 받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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