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밀정’이 추석 흥행의 원톱 승자로 떠올랐다. ‘변호인’, ‘국제시장’ 등보다 빠른 흥행속도로 추석 다음날엔 하루 80만 관객을 돌파하기도 하며 순식간에 600만 고지에 이르렀다. 이렇다 할 경쟁작이 없는 그야말로 신이 내린 대진운으로 장장 5일에 달하는 연휴를 무주공산 속에 달린 결과다.
경쟁작이 강력했거나, ‘암살'을 통해 일제강점기 독립군 이야기에 대한 기대가 생기지 않았거나, 최근 한국영화에 대한 믿음과 갈증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영화에 대한 갈증이란, 상반기에 한국영화 흥행작이 빈약해 한국영화 흥행작에 대한 요구가 생겼는데, 그것이 ’부산행‘ 천만 정도로는 해소되지 않아 그 에너지가 추석 연휴 때까지 이월됐다는 이야기다.
원래 일제강점기 시절 이야기는 너무 암울해서 대규모 흥행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암살’이 경쾌한 활극으로 오락성을 극대화하면서 관객에게 그 시절 이야기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기대를 남겼다. 또, 독립군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서나마 조명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남겼다. 그 흐름 속에서 ‘밀정’이 천만 흥행 속도를 보이게 된 것이다.
‘밀정’ 자체는 ‘암살’처럼 오락성이 높은 작품은 아니다. 스파이물 특유의 서스펜스와 반전의 충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총격액션의 활극 요소가 강한 것도 아니다. 원래는 상업적 요소가 더 적었는데, 그나마 김지운 감독이 오프닝 액션, 중간 기차씬 등을 추가해 재미를 조금 살렸다고 한다. 그 결과 지루하지 않게 몰입하면서 볼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절제된 분위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파이게임의 활극과 같은 재미요소를 절제한 대신에 인물이 처한 상황과 선택을 더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단선적으로 달리는 일본 경찰과 독립군이 아닌, 중간에서 고민하는 밀정 송강호의 선택이 작품의 포인트다. 원래 오락성은 단순성이 격돌할 때 생기는 법인데, 중간자의 고민을 부각시키다보면 영화는 무거워지게 마련이다. ‘밀정’은 하지만 그렇게 무겁지는 않게 최소한의 상업적인 선을 지키면서 송강호가 처한 상황을 따라간다.
송강호의 심경을 따라간다고 하지 않고 상황을 따라간다고 한 것은, 송강호의 심경변화에 대해 영화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그가 처한 상황과 그 속에서의 선택만 보여주는데, 어떠한 심경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관객이 알아서 상상해야 한다.(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있음)
의열단의 영웅적인 인물이 아닌, 중간에서 흔들리는 송강호의 선택을 담담히 보여주면서 영화는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 질문이 됐다. 송강호는 극중에서 조선독립의 희망을 잃고 자신을 대우해주는 일본 경찰에 투신한 인물이다. 하지만 의열단에서 그를 믿고 사명을 부여하자 ‘내일 내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른다’면서도 독립군을 돕게 된다.
거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이병헌의 대사다. ‘난 사람들 말은 물론이고 내 말도 믿지를 못하겠소. 다만 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라면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결정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송강호)는 자신의 이름을 어느 역사에 올리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것은 마치 관객을 향한 물음처럼 느껴진다. 극중에서 송강호는 자기자신도 믿지 못하지만 결국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선택하고 만다. 특별히 영웅적인 기개가 있어서도 아니고, 독립의 희망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에, 그 역사가 옳은 역사이기에 그 길로 갈 뿐인 것이다.
이것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의 가슴에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웅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할 만한 악인도 아니다. 자기자신이 이런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지 스스로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어떤 상황이 주어지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일반인이다. 그런 일반인에게 선택에 대해 고민해보게 하는 것이다. ‘암살’의 경우는 오락적 쾌감이 강한 대신에 여운이 덜했다면, ‘밀정’은 그런 의미에서 많은 생각을 남기는 작품이다.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실패가 쌓이고 우리는 그 실패를 딛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야가야 합니다’라는 이병헌의 대사처럼 영화는 송강호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모습과 함께 끝이 난다. 마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실패를 딛고 이어가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영화는 그런 요구를 대놓고 하지 않지만, 관객 입장에선 그런 요구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고 그래서 자신을 한번 되돌아보게 되는, 그런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이야말로 천만 관객이 공유해도 좋을, 그런 울림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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