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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아역배우 한예린 폭행사건 어떻게 볼까


 

‘제1회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아역배우 한예린 양의 폭행사건이 알려졌다. 처음엔 익명으로 보도됐었지만 이젠 실명이 보도되고 있다. 현재까지 보도된 사건 개요는 이렇다.


한예린 양은 짧은 교복치마를 입고 등교하다 적발되려 하자 같은 반 친구의 치마를 빌려 입어 검사를 받았다. 이후 한 양은 그 치마를 돌려주지 않았다. 치마의 주인은 담임 교사에게 알렸다. 그러자 앙심을 품은 한 양은 교실청소를 하고 있던 두 학생을 자기 친구를 시켜 인근 컨테이너 옆으로 끌고 간 후 3시간에 걸쳐(!) 폭행했다고 한다. 담배연기를 피해학생 얼굴에 내뿜는 등 인격적 모멸행위도 자행했다고 알려졌다.


폭행의 양상이 매우 잔혹하다. 친구들끼리 감정이 상해 서로 싸우고, 화해하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끌어내 장시간 폭행하는 것에선 권력의 냄새가 난다. 조폭이 아니고서야 일반적인 어른은 상상도 하지 못할 폭력이다. 게다가 그 폭력의 주체가 ‘예쁜 어린이’ 출신의 브라운관 천사라니. 이 격렬한 대비가 그로테스크하다.


이 사건을 어떻게 봐야 할까? 특이한 인성을 가진 한 청소년의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고로 봐야 할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이것은 구조적 문제의 발현이다.


이것은 두 가지의 맥락이 겹치는 사건이다. 하나는 학교폭력이고 또 하나는 연예인 문제다.


난 그동안 한국의 학교는 지옥이며 그것이 한국 학생들의 인성을 황폐하게 만든다고 지적해왔다. 또 ‘스타고시’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연예인 되기 열풍은 심상치 않은 사회적 병리현상이라고 지적했었다. 이 두 가지의 구조적 문제가 발현된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잔혹한 학교폭력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예비 학부모들은 장차 자기 자식들을 어떻게 학교에 보낼 지 걱정이 태산 같다. 올 여름에도 학생들이 친구를 5시간 동안 폭행한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었다. 우리 아이들이 망가져가고 있다.


모든 아이들이 연예인과 얼짱을 꿈꾸는, 더 나아가 숭배하는 구조에서 ‘스타고시’에 일찍 패스한 아이들은 특권의식을 쉽게 가질 수 있다. 고시패스 후에 주어지는 것은 권력이다. 스타고시도 또래 집단 사이에서의 권력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또 학교와 주위 어른들이 연예인을 떠받드는 풍토에선 어린 친구의 윤리관이 쉽게 망가질 수 있다.


인류 역사 이래 언제나 아름다운 외모는 찬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 사회의 얼짱 열풍은 병적이라고 할 만큼 강박적이다. 외모숭배신드롬의 그림자가 성형열풍이다. 숭배의 대상이 되는 얼짱의 권력이 얼마나 강한 지는 몇 년 전에 밝혀진 얼짱 폭행 사건으로 그 일단이 드러난 바 있다. 얼짱의 팬이 얼짱에게 꼼짝도 못하고 맞았던 사건이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교육을 받아야 하는 존재다. 학교라는 제도는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곳에서 시민의식, 공동체의식, 윤리의식을 배워야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는 오로지 경쟁만을 강요한다. 그리하여 인성을 배양할 틈이 없다. 오로지 경쟁으로 남을 밟고 올라서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만을 주입받을 뿐이다. 강자는 특권을 누리며 군림하고 약자는 능멸 받는 구조가 골수에 새겨진다. 이것은 아주 쉽게 현실세계의 권력관계로 치환된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최근의 학교폭력 양상은 그 귀결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아이들의 인성이 피폐해지는데 아예 교육, 또래집단으로부터 분리된 연예인, 연예인 지망생의 인성은 어떻게 될까?


서양에서도 아역 스타들은 어른이 되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쉽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매컬린 컬킨, 에드워드 펄롱,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이 그렇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자신에 대해 무너지는데 반해, 우리처럼 구조적으로 폭력적인 환경에선 그 파탄의 양상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음을 얼짱 폭행사건이나 이번의 한예린 폭행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한예린 양에겐 그전부터 폭력적이라거나, 폭행을 저질렀다거나 하는 소문들이 있었다고 한다. 학교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것을 그냥 넘어갔다. 중요한 건 개인의 윤리성이 아니라, 성공해서 부자가 되는 것이라는 사회파탄상이 이런 대목에서도 드러난다.


예쁜 어린이스타의 친구 폭행. 이것이 우리의 광복절 풍경이다. 한국 사회는 구조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폭행하는 체제다. 최근의 양극화 심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반 국민이 가난해 질 때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됐다는 건데, 이것은 강자가 약자의 ‘삥’을 뜯는 사회라는 걸 의미한다. 강자위주의 폭행사회. 이런 꼴을 보려고 광복을 기뻐한 건 아니었을 텐데.


사회모순은 그렇다치고. 학교와 학생들은 사회와 달라야 한다. 학교는 인성, 덕성, 시민성을 기르는 곳이어야 한다. 학생은 연예인 활동에 앞서 이런 덕목들을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공부짱과 얼짱과 연예인이 숭배 받는 곳은 이미 학교가 아니다. 공부짱에게도 공동체적 가치를 가르쳐야 하고, 연예인도 친구와 어울려 배워야 할 존재라는 걸 학교, 부모, 방송사, 기획사 모두가 인식해야 한다.


공부 잘한다고 ‘오냐오냐’해주고, 연예인이라고 ‘오냐오냐’해주는 어른들부터 제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소리다. 학생은 학생답게 키워야 한다. 친구를 몇 시간 동안 폭행하는 괴물들을 다시는 길러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