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중의 한 명이었던 윤정희가 프랑스에서 방치된 상태라는 국민청원이 지난 5일에 게재돼 파문이 일었다.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이름이 명시되진 않았지만 주인공이 윤정희일 거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었다. 남편과 딸이 치매와 당뇨에 걸린 윤정희를 방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자기 집에서도 쫓겨나 파리 외곽의 한 아파트에서 홀로 사는데, 혼자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감옥 같은 생활이라고 했다. 자유가 심각하게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정희의 형제들이 전화와 방문도 자유롭게 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다고 했다. 2019년에 한국에서 잘 있던 윤정희를 남편과 딸이 강제로 납치하다시피 끌고 갔다는 놀라운 주장까지 했다. 워낙 충격적인 내용이다보니 일파만파 퍼졌고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면서 윤정희의 남편인 백건우를 의심하는 의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청원 내용엔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방치됐다면서 자유가 없다고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보통 가족이 돌보는 경우에도 치매 환자가 불쑥 외출하는 경우가 많다. 윤정희가 혼자서 밖에 나가지도 못한다는 건 누군가가 계속 함께 있음을 시사한다.
굳이 별도의 아파트를 구해서 윤정희를 방치했다는 부분도 이상하다. 방치할 의도가 있었다면 요양시설에 맡기는 편이 더 간편했을 것이다. 아파트를 구해서 기거하게 할 이유가 없다. 청원 내용엔 마치 윤정희가 감금된 것처럼 묘사됐는데, 만약 감금이 있었다면 현지 경찰에 신고할 일이다.
백건우가 한국에서 잘 있던 윤정희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주장도 이상하다. 방치할 생각이라면 잘 지내는 대로 그냥 두면 되지 왜 힘들게 끌고 간단 말인가?
이런 점들 때문에 의문이 커져가던 차에 현지에서의 소송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윤정희는 3남 3녀 중 장녀인데 동생 5명 중 3명이 백건우를 상대로 2019년 5월에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백건우와 딸이 윤정희의 후견인으로 지정된 데에 대한 이의 신청이었다. 1심에서 윤정희의 동생들이 패소했고, 이에 동생들이 항소까지 했으나 항소심에서 2020년 11월에 최종 패소했다고 한다.
프랑스 법원의 판결문엔 ‘윤정희가 백건우 및 딸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 현재 그녀는 안전하고 친숙한 환경에서 안락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 ... 백건우와 딸이 윤정희에게 애정을 보이지 않으며, 윤정희가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고 금전적 횡령이 의심된다는 주장은 서류를 살펴본 결과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적시됐다고 언론이 알렸다.
청원에서 호소한, 윤정희 동생들의 면회와 전화연락을 통제한다는 내용도 프랑스 법원의 판결이라고 한다. 외부접촉이 윤정희의 심적 불안을 초래할 위험이 있어 접촉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아직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알 수 없지만, 현지 법원에서 1심, 2심 모두 이런 판결이 나왔다면 어느 정도의 신뢰성을 인정할 순 있다. 애초부터 청원 내용에 이상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판결 내용까지 더해지자 청원 내용을 일방적으로 믿기는 어려운 상황이 됐다.
백건우 측에서도 해명을 내놨다. 청원 내용이 허위사실이라는 것이다. 윤정희의 건강이 최근 매우 악화돼 백건우와 연주여행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됐는데, 요양병원에 보내는 것보다 가족이 돌보기 위해 딸의 거주지 옆에 윤정희의 집을 구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법원과 백건우 가족이 지정한 간병인이 돌보고 있으며 의사가 주기적으로 진료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개인사가 낱낱이 공개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한 매체는 청원 내용이 ‘100% 거짓말’이라는 윤정희 지인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청원 내용만 보고 공분했던 초기 일각의 반응은 확실히 섣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 말만 듣고 공분했을 때 종종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만들기도 한다. 이번 일로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논란은, 양쪽 말을 다 들어보고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는 점이다.
프랑스 법원의 판결을 보면 최소한 청원 내용에 있는 것 같은 심각한 인권유린, 감금 등이 행해졌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가족 간의 내밀한 분쟁일 것이다. 이 부분은 어차피 제3자가 판단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가정사는 당사자들이 해결할 사안이다. 국민청원에까지 올려서 공론장을 떠들썩하게 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연예인인 윤정희가 자신의 가정사가 진흙탕 논란으로 까발려지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국민청원의 남용을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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