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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예능선수촌 왕기춘의 웃음에서 희망을 보다

 

 

예능선수촌에 올림픽 선수들이 출연했다. 이용대, 남현희, 이배영, 왕기춘 선수다. 이들을 보면서 즐거웠다. 그리고 웬지 희망도 느껴졌다.


옛날에 우리나라 올림픽 선수들하면 떠오르는 건 눈물이다. 고생, 고생, 고생, 고생으로 점철된 삶이 한이 되어 눈물로 북받쳤다. 꼭 개인적으로 고생을 하지 않았어도 주위에서 가해지는 압박 때문에 선수들은 무슨 비장한 전사같은 눈빛으로 경기에 임했고, 이기든 지든 눈물을 쏟았다. 이기면 감격해서, 지면 죄송해서.


박태환 선수는 마치 신인류같은 느낌을 준다. 선진국이라면 별로 특이할 것도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렇다. 박태환의 특징은 구김살이 전혀 없다는 데 있다. 그저 환하다. 한국 역사상 대단히 의미 있는 금메달을 딴 순간에도 박태환은 당당히 웃고 말았다. 그에게선 고난에 찌든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박태환 선수에게 한국인이 열광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런 미래형 한국인 같은 느낌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지난 월드컵 4강 때부터 우리 선수들한테 이런 느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전 월드컵까지만 해도 우리 ‘태극전사’들은 정말로 비장한 전사들이었다. 2002년 월드컵 땐 그렇지 않았다. 그때 우리 선수들은 당당하고 환하게 그라운드에 섰다.


아직도 폴란드전이 생각난다. 첫 골이 터지고 나서 ‘이쯤은 아무 것도 아니야’라는 듯이 손가락을 흔들던 황선홍 선수의 모습. 그건 한 맺힌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전혀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 왕기춘의 웃음 -


올림픽 기간 중 왕기춘 선수는 구시대적 국가대표선수의 이미지로 다가왔다. 세계 2위를 하고도 죄송하다고 우는 모습에서 한국인은 실망했다. 왕기춘 개인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아, 한국사회는 아직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이런 자탄이었다. 그 속에서 박태환 선수의 자신만만한 환한 웃음은 단비와도 같았다. 그것은 한국인의 자신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능선수촌에 나온 왕기춘 선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는 당당했고 시원시원했다. 구김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도 없었고 한 맺힌 결기도 없었다.


이제 보니 올림픽 때 운 것은 구시대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열화와 같은 본인 성격 탓이었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분해하는 당당함. 국가대표로서 주위의 기대도 마음에 담아두는 책임감. 이런 책임감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 아무리 개인주의 시대라도 국가대표는 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다만 과거엔 그 책임감이 너무 과했던 것이 문제였다. 알고 보니 왕기춘 선수의 책임감은 건전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금메달 딸 경우에 대비해서 ‘텔 미’ 춤을 준비했었다고 한다. 과거 한국인에겐 이런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집념만이 있었을 뿐이다. 배고픔에서 탈출하겠다는 집념, 이기겠다는 집념, 1등이 되겠다는 집념. 물론 1등 집착은 요즘도 심하지만 한 쪽에선 새로운 한국인들이 자라나고 있다. 그들은 당당하고 밝다.


왕기춘 선수의 웃음에서 그런 한국인의 모습을 봤다. 왕기춘 선수뿐만이 아니다. 이용대, 이배영, 남현희 선수도 모두 당당했다.


남현희 선수는 자신의 성형을 농담의 소재로 삼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다. 서인영에게 “(성형이) 잘 되셨어요”라고 말을 건넬 만큼 여유가 있었다. 한 맺히고 주눅 든 과거 한국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네 선수 모두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한국인의 성격이 바뀌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한국인이 변할 때 꼭 좋은 쪽으로만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한국인은 과거보다 더 이기적이고 황금만능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왕따나 증오범죄같은 극악한 경향도 나타난다. 이런 것들만 보면 한국사회가 암울하다.


네 선수를 보며 새로운 한국인의 밝은 면을 봤다. 한국인이 이렇게 당당해진다면 한국도 보다 밝아질 것이다. 박태환만 신인류가 아니라 다른 많은 선수들도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사회도 이렇게 어두움에서 밞음으로 가면 좋으련만. 현실에선 여전히 국민 다수가 고통 속에 있다. 그래도 왕기춘 선수의 웃음은 보기 좋았다. 희망이 그 속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