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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영상 칼럼

선덕여왕 전투신이 최고였던 이유

 

<선덕여왕> 10회 전투신은 최고 수준이었다. 긴박감, 절박감, 계략, 공포, 야성, 의지 등 모든 것이 생생히 표현되어 눈을 뗄 수 없는 몰입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이렇게 몰입도가 높은 전투신을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요근래 사극 전투신의 문제는 오직 볼거리에만 치중한다는 데 있었다. 불화살, 돌굴리기, 칼싸움,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이미지, 넘어지는 말 등 전형적인 볼거리가 제시되며,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군중신이 추가된다. 이런 볼거리를 제공하면 시청자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마치 여자 출연자를 벗기면 보는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고 여기는 일부 제작자들처럼.


사람의 정서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볼거리만 제공된다고 마음이 동하지는 않는다는 소리다. 게다가 한국의 사극이 제공할 수 있는 볼거리의 수준이란 게 너무나 뻔하다. 이미 <반지의 제왕>과 <글래디에이터>를 본 국민들이다. 우리 사극이 제공하는 조악한 그래픽과 소대 단위 칼싸움에 현혹될 수준이 아닌 것이다.


설사 아주 잘 만든 볼거리라 해도 그로 인한 감동은 일회적인 것에 그친다. 와중에 볼거리의 수준조차 떨어진다. 그런데도 그것 하나로만 밀어붙인 것이 우리 사극의 전투신이었다. 안습일 수밖에 없었다. 전투신 같은 폭력 장면은 원래 가장 흥미진진해야 정상인데, 한동안 우리 사극에선 인물들의 대화가 더 박진감이 있고 전투신은 졸립기만 했다.



- 정선이 번쩍 나는 <선덕여왕>의 전투 -


<선덕여왕>은 전혀 달랐다. 무작정 볼거리를 내지른 게 아니라 강약을 조절하며 천천히 순서대로 치밀하게 전개해나갔다. 근래 우리 사극 전투신의 특징인 좋게 말해 ‘난전’, 까놓고 말해 ‘개싸움’판이 아니라 그 속에 질서가 있었다. 그 질서는 몰입을 유도했다.


똑같은 분대, 소대 단위 전투라도 <선덕여왕>의 화랑들은 칠을 하고, 풀로 위장하여 마치 현대 전투물을 보는 것 같은 긴장감을 조성했다. 알천랑의 수신호에 따라 이루어진 일사분란한 습격 모습도 박진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인물들의 정서를 배치했다. 전투와 인물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심리적 롱샷과 심리적 클로즈업샷이 병행되는 효과를 발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긴박감을 배가시키며 인물들의 당혹감과 공포심에 보는 이가 감정이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노병부대를 기습하는 장면의 풀숲진군장면은 시각적으로도 강렬했다. 바로 뒤이은 전투, 그리고 승리의 나팔을 부는 모습은 대단히 야성적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흥분을 준 사극 전투신을 근래엔 확실히 못 본 것 같다.



- 세심한 전개 -


<선덕여왕>의 전투에선 전략의 흐름이 충분히 표현됐으며 소규모 전투에서도 그 단계가 분명히 제시됐다. 이런 흐름과 단계의 표현을 일컬어 ‘질서’라고 한 것이다.


무작정 물량을 풀어놓고 싸움판을 벌려놓으면 그 구체적인 전개를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러면 전투신은 마치 기차 창밖으로 흘러 지나가는 풍경처럼 보는 이와 상관없는 볼거리에 불과하게 된다.


전투의 과정과 단계가 세심히 표현되고 전략의 흐름을 관객이 인지할 수 있을 때 관객은 비로소 그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면 설사 전투의 규모가 작더라도 군중신 이상의 심리적 충격을 줄 수 있다.


<선덕여왕> 전투신은 그런 점에서 성공했다. 초반 <대조영>같은 대규모 전투신의 흥분은 없었지만, 세심한 전개와 묘사로 효율적인 심리적 효과를 자아냈던 것이다.


<글래디에이터>에서도 검투사가 된 주인공이 분대단위 검투사들을 지휘해 전략적으로 적과 맞서는 장면에 상당한 힘이 있었다. 미국 드라마 <롬>에서도 로마 군단의 소대규모 부대가 진을 짜며 적에 맞서는 장면이 대규모 전투신 못지않은 박진감을 안겨줬다. 부대의 전략적 행동을 세심히 묘사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10회에선 궁수부대 기습장면에서도 그렇고, 마지막에 덕만이 진형을 지휘하는 장면에서도 소대의 전략적 행동을 세밀히 묘사했다. 그러면서 그 안에 주요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이 세심하게 배치됐다.


그 결과 그냥 눈앞에서 지나가버리는 전투신이 아닌, 시청자의 정서를 약동시키는 전투신이 만들어진 것이다. 모처럼 우리 사극에서 제대로 된 전투신을 봤다. 통쾌하다.


한 마디만 더 하자면, 신라시대 화랑은 거의 전투기계였을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람보였다고나 할까? 소규모 전투에서 그 기계적 전투력과 다져진 조직력, 용맹성이 표현된다면 설사 대규모 전투신이 없어도 <선덕여왕>의 전투신은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