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에 25회를 기점으로 <선덕여왕>에 대변혁이 일어났다. 주인공인 덕만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바로 직전까지 ‘땡깡’이나 일삼으며 적 앞에선 벌벌 떨었던 응석받이 여주인공이 어떻게 한 회 만에 침착하고 결연한 영도자가 될 수 있는지는 불가사의하지만, 어쨌든 덕만은 변했다.


그리하여 한 쪽이 허전했던 극의 구도가 바로 서가고 있다. 덕만이 각성하기 시작한 것으로도 모자라, 덕만 곁에 사람들까지 본격적으로 모이고 있다. 게다가 모두 꽃미남들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엘리트 꽃미남 전사 청년들이 덕만 주위에 포진하면서 <선덕여왕>은 각성한 덕만과 F4의 영웅적 로망스가 돼가고 있다.


그렇다면 미실의 캐릭터가 죽었는가? 그것도 아니다. 덕만이 강해지면서 미실은 더욱 영웅처럼 보이고 있다. 악당의 최종 보스인 미실의 존재감이 오히려 강력해지는 가운데, 주인공은 비로소 주인공다워지면서 주인공 진영의 캐릭터들이 ‘빵빵’하게 채워지는 초 흥미진진 국면으로 전환한 것이다. 와중에 엄태웅은 눈빛광선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아, 난 엄태웅이 눈이 힘주는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 비극적인 영웅 미실 -


미실은 비극적인 영웅이 돼가고 있다. 미실은 운명에 속박당한 자이면서, 그 운명을 거스르는 자다. 동시에 성골이 아니라는 신분에 속박당한 자이면서, 그 신분의 굴레를 거스르는 자이기도 하다.


신관은 미실에게 계속 덕만을 죽이라고 경고한다. 예언 때문이다. 미실은 말한다.


‘예언? 웃기지 마! 내 운명은 내 것이야.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해!’


인간은 본시 약한 존재다. 하늘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 선 인간은 풀벌레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인간에겐 인간만의 힘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의지’다. 의지가 인간을 위대하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대단한 의지라도 섭리를 이길 순 없다. 의지를 품고 투쟁하다가 거대한 섭리 앞에서 스러져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영웅이다. 영웅 중에서도 비극적인 영웅.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천상의 신들에게 희롱당하는 연약한 존재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예언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그 섭리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한다. 그것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든다.


미실도 그렇다. 미실은 북두칠성의 예언으로 몰락이 예정된 자다. 하지만 미실은 그 예정된 운명에 저항한다. 미실 옆에 포진한 전노민의 설원도 그렇다. 설원은 신분의 족쇄를 차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미실과 함께 자신의 신분에 저항한다. 반면에 미실의 남편인 상대등 세종과 그 아들 하종은 자신들의 신분만 믿고 설원을 무시한다. 이런 캐릭터는 매력이 없다. 그리하여 설원과 그 아들 보종의 존재감이 훨씬 크며, 거대한 운명에 저항하는 미실은 더욱 거대한 영웅으로 보인다.


작가가 미실이 천관의 경고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어쩌면, 미실이 오만해진 나머지 자멸한다는 설정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의도가 어떤 것이든 결과적으로 운명을 거스르는 미실이 위대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낳았다. 그래서 최근 덕만 진영에 꽃미남들이 모여도 미실의 존재감이 전혀 타격받지 않았던 것이다.


미실이 지금처럼 찌질하거나 악랄한 악당이 아닌 영웅처럼 보이는 한, 작품 후반부 미실의 몰락은 비극적인 연민을 자아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비극성은 삼국지와도 일정 정도 유사하다.



- 보다 큰 꿈이 필요한 덕만 -


덕만은 쌍생의 저주를 거스르려 한다. 하지만 덕만은 미실을 무찌를 것이란 예언을 타고났기 때문에, 결국 큰 틀에서 보면 섭리 안에서 움직이는 자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덕만은 날 때부터 공주였다. 덕만의 메시지는 이런 것들이다.


‘내가 태어날 때 내 입에 물고 있던 금수저 되찾을 거야. 내 기득권 되찾을 거야.’


이건 좀 약하다. 덕만에겐 더 큰 동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지도자로서 신국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모두를 위한 보다 큰 꿈. 주몽, 대조영, 장보고 등 성공한 서사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런 것들을 제시했었다.


이번 주에 덕만은 지금까지 보이지 못했던 강력한 의지를 보여줬다. 이 정도만 해도 덕만에겐 큰 변화다. 하지만 덕만은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덕만의 꿈이 위대해 질 때, 덕만 옆에 포진한 F4들도 위대한 영웅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영웅 미실과 덕만 꽃미남 영웅군단의 투쟁!



- 얼마나 기다렸던가, 눈빛광선 엄포스 -


그동안 고뇌하면서 눈빛이 흔들리는 ‘김햄릿’에게선 김유신 장군의 ‘포스’를 느낄 수 없었다. 엄태웅의 존재감은 추락했고 급기야 연기력 논란까지 터졌다. 알천랑과 비담이 차례차례 스타가 될 때 정작 주인공인 엄태웅은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굴욕당했던 것이다.


이번 주에 엄태웅은 처음으로 능동적이며, 결연하고, 전격적인 행동을 보였다.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즉각적으로 가야 세력의 본진으로 가 담판을 지었던 것이다. 시청자의 호흡을 앞질러 간 결단이었다. 같은 시기 덕만도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가야 세력으로 치고 들어가는 결단(혹은 무모함)을 선보였다. 작가가 이들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정한 것 같다.


엄태웅이 흔들리는 눈빛을 버리고, 결연한 눈빛을 보여야 한다고 계속 주문했었다. 이번 주에 비로소 엄태웅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엄포스의 눈빛광선이 드디어 터져 나온 것이다. 엄태웅이 눈에 힘주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동안 정말 답답했었다. 엄태웅은 주인공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태웅과 덕만의 변신은 이제 시작이어야 한다. 아직은 약하다. 위에 언급한 더욱 큰 꿈, 그리고 엄태웅의 더욱 강력한 군사지도자로서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작가가 작정한 것 같으니까 앞으로 변신엔 탄력이 붙을 수 있겠다. 주인공들의 변신과 섭리의 힘 앞에 비극적으로 스러져가는 미실, 미실을 딛고 위대한 신국을 준비하는 덕만과 꽃미남군단 F4의 로망스. 흥미진진하다.


Posted by 하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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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실의 오만함과 자멸...그것이 미실의 운명이군요. 권력을 지닌 자가 보여주는 마지막 모습은 아닐런지.
    그나저나 어젠 엄태웅이 그나마 지금까지의 아쉬움을 덜어낸 듯해요. 그런데 아직도 2%가..아쉬움

  2. 유신에 관한 부분도, 미실에 관한 부분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3. 각성한덕만..주위의 F4.. 2009.08.19 11:52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주소

    이부분에서 절대공감한 사람은 저 하나인건가요??ㅋㅋㅋ

    엄포스가 부활했다고는 하던데...
    전 오히려 월야의 연기에 마음이 움직이더이다..
    눈에 힘 팍팍 들어간 엄태웅의 연기가 아직은 약간 불편해보이더라구요..

    그에반해 대치모드였던 월야역의 주상욱씨.. 사극을 그렇게 잘 소화해 내실줄이야...
    보는내내 감탄모드~~^^

    뭐...그냥 그렇다구요... 절대 태클아닙니다.. 위트가 넘쳐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4. 공감합니다.
    어제 엄태웅씨 발성. 눈빛 멋지더군요.
    약간의 시간 편집, 카메라 에러로 약간 오버스러울 뻔 했는데...그래도 그 더운 날씨에 그정도 포스는 인정합니다.
    엄태웅씨 연기. 좋습니다. 선덕여왕으로 굳건해지시겠어요. 흐믓합니다.

  5. 엄태웅씨, 어제 지대로 빛났습니다. 군신관계의 자신을 추스리고 가야와의 동맹으로 힘을 실어주는 유신, 정말 지대로 였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6. 잘 읽고 갑니다.
    엄태웅씨가 김유신역을 한다고 하길래 그 기대로 선덕여왕을 보기 시작했는데
    캐릭터가 엄태웅씨한테 영 맞지 않는 거 같아 실망하던 참에, 갑자기 살아나더군요. 다행.. ^^
    정면을 보고 노려보는 눈빛에 티비 보는 저까지 움찔.. ^^;;
    앞으로의 김유신을 기대하게 하는 26회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