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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사회문화 칼럼

혼, 재범, 정수근, ‘다 죽여버리겠어!’

 

기대를 모았던 공포드라마 <혼>이 용두사미로 끝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줬다. 여기에 대한 비판은 많다. 이상한 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혼>의 범죄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없었다는 거다. 나에겐 이게 더 실망스럽고, 무서운 일이었다.


<혼>은 범죄자에 대해 한 맺힌 드라마다. 여기서 범죄자들은 절대 악인이다. 한번 나쁜 놈이면 평생 나쁜 놈이다. 누군가 나쁜 짓을 했다면, 그건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우연의 탓이 아니라, 그 자가 뼛속까지 나쁜 놈이기 때문이어서다.


나쁜 놈들 사이엔 질적인 차이가 없다. 나쁜 놈들은 다 똑같은 나쁜 놈이고, 죽일 놈들이다. 그 놈들은 모두 다 비열하고, 악랄하고, 잔인한 연쇄살인범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놈들을 교정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 놈들은 아예 애초부터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버리는 것 외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그 놈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 놈들은 악마다. 죽여야 한다. 어린 10대건, 30대건, 50대건 나쁜 짓을 한 놈들은 모두 악마다. 죽여서 박멸해야 한다.


<혼>에 담긴 범죄관은 이런 것이었다. 이에 대해 언론은 <혼>이 귀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회드라마라고 평했다. 나쁜 놈들의 괴수가 정치인을 지망하는 것도 호평했다. 범죄관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다.


네티즌들의 반응은 더 무서웠다. <혼> 중반부에 네티즌들이 <혼>의 범죄관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글을 썼길래 봤다가 깜짝 놀랐다. <혼>에는 범죄자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처벌이나 배제가 아닌 방식으로 그들을 교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서진의 친구가 나온다. 그 친구를 비난하는 내용들이었다.


<혼>에서 그 친구는 완전히 바보로 나온다. 멍청한 범죄관으로 범죄자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고, 나중엔 자기가 살려준 범죄자가 무서워 벌벌 떠는 찌질이 캐릭터로 그려진 것이다. 그런 사람의 범죄관이 짜증난다는 것이 네티즌의 주장이었다.


아무도 <혼>의 범죄관이 지나치게 불관용적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나쁜 놈은 그저 나쁜 놈일 뿐이라는 관점에 모두들 동의한 것이다. 이야말로 귀신보다 무서운 사회의 모습이었다. 나는 행여나 막판에 관점이 바뀔까 하여 <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혼>은 마지막까지 나쁜 놈은 악마나 마찬가지이며, 착한 사람이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악마에게 당할 뿐이니 인정사정없이 박멸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고, 왜 막판에 흐지부지 끝냈느냐는 불평만을 쏟아냈다.



- 살벌해지는 한국사회 -


툭하면 ‘죽여버려라’라는 극단적인 외침이 터져나온다. 가장 최근엔 2PM의 재범이 사적인 공간에서 고향 친구와 나눈 시시껄렁한 푸념 때문에 가수로서 처형당했다. 그 전엔 유사 전과가 있는 정수근이 술 먹고 난동을 피웠다며 선수로서 처형당했다. 사실관계가 애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수근에게 전과가 있으니 당해도 싸다며 처벌을 지지했다. 선수생명이 끝나는 극단적인 처벌임에도 불구하고!


그 직전엔 베라가 한국을 욕했다며, 책 내용을 확인도 않은 채 베라의 하차를 요구했다. 뭐만 걸렸다 하면, 그 사람이 해당 분야에서 당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다. <혼>에 나타난 범죄관은 그런 극단적인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나쁜 놈에겐 배제나 극형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


한국이 점점 흉흉해지고 있다. 관용 따위는 현실을 모르는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혼>에 담긴 생각이었고, 아무도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살벌한 사회로 변화하는 것은 미국을 떠올리게 한다.


미국에서도 몇 년 전부터 증오와 불관용의 분위기가 더욱 강력해지는 것이 감지된다. 미국 영화를 보면 미국 사람들이 테러와 범죄 때문에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으며, 그 박멸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시의 정책도 미국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침략, 학살, 납치, 투옥, 고문 등으로 나타났다. 레이건 시절부터 미국은 범죄에 대한 불관용 정책을 취했고, 강력한 법집행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범죄를 증오하고 안전을 희구하던 국민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그 결과 미국인이 맞은 21세기는 어떤 모습인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더욱 강해진 공포와 증오뿐이다. 미국은 범죄 대국이 됐다. 1970년에 20만 명 선이었던 재소자수가 2001년 경엔 200만 명, 청소년까지 합하면 300만 명 선으로 불어났다. 그렇게 범죄자들을 가둬도 범죄는 끊임없이 일어나며 미국인은 공포와 처벌의 악순환에 빠져있다.



- 불관용은 또 하나의 차별 -


어렸을 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다. 상당수의 성인 범죄자들도 물론 저소득층이다. 이때 사회가 <혼>에서 나온 범죄관대로 ‘나쁜 놈은 악마야! 엄벌에 처해!‘를 외치면 처벌의 강도만 강해질 뿐, 저소득층이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사회적 구조는 온존하게 된다.


심지어 <혼>은 10대 범죄자까지 악마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를 일으키는 저소득층 아이들을 순화시킬 방법이 없게 되며 오히려 더욱 강한 범죄자로 길러낼 뿐이다. 불관용이 결국 저소득층에 대한 차별이 되는 것이다. 조너선 닐은 미국의 불관용 정책이 범죄를 퇴치하기는커녕, 저소득층인 흑인차별의 효과만 낳았다고 지적했었다. 거기에서 쌓인 불만이 경찰폭력에 대한 흑인폭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범죄를 퇴치하는 것은 범죄자들에 대해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들이 무언가가 부족해서 나쁜 짓을 했다면, 처벌할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는 마음. 사회가 그런 생각에 의해 움직일 때 범죄는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가진 자가 잘못했다면 추상같이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설사 잘못을 했다고 해도 기회를 더 주고 안아주는 풍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구조가 잘못됐을 때 비명을 지르는 건 당연히 패자들, 약자들이다. 냉혹한 사회는 이들의 열등함, 나태함을 비웃을 뿐이다. 따뜻한 사회는 소득재분배와 교육·일자리 정책으로 그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다. 그런 사회에선 양극화가 나타날 수 없고, 지나친 경쟁의 폐해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의 삶과 정신이 안정돼 범죄도 줄어든다. 설사 선천적인 사이코패스라 해도 안정되고 따뜻한 환경에서라면 그 성정이 발현될 가능성이 줄어든다고 한다.


냉혹한 사회는 약자를 방치하므로, 양극화가 심화되고 아비규환의 경쟁이 일어난다. 이것이 1998년 이후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이다. 그에 따라 자살률이 치솟는 등 국민들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지고 있다. 불안과 스트레스 상태에 빠진 국민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해소할 대상을 찾는다. 걸리면 죽는다. 범죄자? 죽여! 연예인이 욕을 했어? 죽여! 정수근이 또 술을 먹었어? 죽여!


이러면 미국과 같은 불관용과 공포의 악순환에 빠져들 뿐이다. 범죄자든, 연예인이든, 운동선수이든, 모두에 대한 관용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고 우리의 사회를 살릴 것이며, 결국 모두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